해 지는 사거리 모퉁이 점집 앞에서 한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내는 한 발을 낡은 자전거 페달에, 한 발은 아스팔트 바닥에 대고 어색하게 서 있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그에게서 너구리 털 타는 냄새가 났다 나는 사내와 나란히 서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우중충한 5층짜리 회색 상가 건물 두 동이 기울어 가는 햇빛을 받아 거대한 황금 덩어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왼손에 작은 호두알 두 개를 굴리고 있다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리만치 번쩍거리고 손에서는 연신 마른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상가의 유리창들이 한 장씩 차례로 불타올랐다 그와 조금 뒤처져서 걸어가는데 사내가 상가 앞에서 가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주인이 뭐라 뭐라 하고 사내는 그 말을 듣고 서 있다 흘낏흘낏 그를 바라보며 지나쳐 걷는데 자전거를 타고 그가 나를 앞질렀다 왼손으로 호두알을 굴리며 코를 싸쥐게 하는 냄새를 풍기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가게 문을 열고 서서 묻는다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땅거미가 깔리고 상가엔 작은 조명등이 하나둘 켜졌다 자동차들이 사거리를 달리다가 천천히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가로등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다

                                               - 「조도」/신성희        

 

 낮과 밤의 경계 그러니까 해질녘 그 사거리에서 한 사내가 화자의 시선을 이끌어 가리키면서 묻는 ‘저기’는, 두 사람이 바라보며 확인하였고, 게다가 가까이 있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금방 닿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곳은 보이지 않는 ‘거기’가 아니라 시야에 포착된 ‘저기’이며, 실제로는 ‘우중충’하긴 하지만, 이제 낙조의 찬란한 ‘햇빛을 받아 거대한 황금 덩어리처럼 빛나고 있’는 ‘5층짜리’ 성채, 이제 그 외양의 ’회색’도 은폐된 ‘상가 건물 두 동’이다. 그런데도 그가 왜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우리는 금방 이 시가 겉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속 이야기를 병렬하는, 즉 두 겹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알레고리 우유(寓喩)의 시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각설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요령부득 이상한 ‘사내’의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며, 화자가 묘사하는 그 면모를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다. 흠 그렇다면 첫째, 질문하면서도 ‘호두알 굴리기’를 하는 걸로 보아 그는 자기중심 취미와 관성에 경사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 ‘이상하리만큼 번쩍거리’는 ‘눈동자’에서 그의 정신이 미치지는 않았을지라도 무언가 편향의 강렬한 집념에 스스로 갇혀 있으며, 셋째, ‘손에서는 연신 마른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에서, 마른 수건도 쥐어짜듯 어떤 수거에 악착같거나 재물에도 그렇게 집착하는 인격이 아닐까 유추할 수 있겠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너구리 털 타는 냄새가 났다’, 즉, 동물의 고기나 털 따위가 타며 나는 역겨운 냄새인 누린내가 풍겼다는 진술에서, 그 취지대로 그를 ‘매우 인색하고 이해타산에 골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린내 풍긴다’는 언급은 ‘어떤 사람이 부정 행동을 하고 간 곳에는 반드시 남는 그 흔적’을 지시하는 환유이기도 하다. 또 묻고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무례한 뒷모습에서도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런가. 그래서 우리는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가서도, 아니 바로 그 ‘황금 덩어리’ 두 ‘오층’에 이르러서도, 그 건물 ‘가게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역시 그 ‘냄새를 풍기며’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는’ 모습, 그것도 두 번이나 연속 묻는 이해 못할, 그 괴상하고 기이하며 좀 흉측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모습을 목격하며 가슴 한 구석이 찌릿하다. 세상사에 달관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겨우 절제하고 위로하며 마시는 석양배(夕陽杯)의 취기와는 아주 다르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 사내가 그러다가 직면한 처지이자 이 시의 결미인, ‘땅거미가 깔리고’ 이후를, 이 시의 제목 「조도(照度)」와 관련하여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상가에 작은 조명등이 켜’진 해질녁을 지난 시간, 조도가 변화한 즈음, ‘가로등 푸르스름한 불빛’이 ‘무겁게 떨어져 내리’고, 그 ‘아래’에서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는 ‘그’. 같은 공간이지만 조도의 광원(光源)이 바뀌자 ‘그’는 ‘황금 덩어리’ 두 ‘오층’ 성채를 더욱 인지할 수도 찾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너무 교훈적인가? 황금에의 욕망과 정처 없는 모순을 풍자하는 알레고리 시가 가끔 출현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지만, 주관의 주장이 아니라 객관의 성찰에 짐짓 부응하려는 이 시에는 우리가 앞으로도 반추해야 할 매력과 개성이 있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국면과 조도의 차이를 정황으로 하고, 아닌 듯도 하지만 그로테스크한 언행을 차례차례 가미한 한 편의 짧은 로드무비이면서도 낙인처럼 인상 깊은 한 폭의 회화이고, 우리의 머리와 가슴의 욕망에 우울하고 선명하게 새겨진다. 그래서인가. ‘한 발을 낡은 자전거 페달에, 한 발은 아스팔트 바닥에 대고 어색하게 서’서 길을 묻는 ‘그’의 일상성 평범한 모습마저도 이 시의 맥락과 정조에 도취되어 선가, 그마저도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멀리 멀리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쉬지 않고 굴러와 해질녘에 드디어 황금 탑을 보게 되었지만 그러고도 세 번 ‘저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물어야 하고, 가까이 갈수록 닿을 수 없는 신기루 앞에서 결국 낙백 방황하는 그, ‘그’는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가로등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다’는 이 시의 결미를 다시 읽다가, 뜻이 있다면 우리는 그 다음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집착, 그 미몽과 허상에서 깨어나는 ‘그’의 언행을. 시인이 풍자 끝에 우리 독자들에게 미루어둔 여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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