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영민하고 대체로 세상을 시시하게 보는 후배, 해질녘 술에 취해 청탁(淸濁)을 왕래하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밴 문자를 가끔 보내는 소설가 후배가 다음 시를 보내왔다. 자신의 소감도 붙여.

 

꿈에 엎드려 시를 쓰면

나는 접붙인 나뭇가지의 이음새처럼

가벼운 설움에도

마음이 톡톡 부러진다

 

누군가 늘어진 시간을 부추겨

나의 굽은 허리와 

부르튼 발바닥을 감추고

놀리고 위로하다

등 떠미는 모양이다

 

인질처럼

우두커니 말을 삼키던 사람들이

꿈길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손짓하다

하나, 둘, 사라진다

아는 얼굴들이다

 

무릎 꿇고 써볼까

손자국 난 얼굴로

 

꿈에 엎드려 시를 쓰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같은 불길함이여

제 발끝을 내려다보는 흉상(胸像)처럼

붉은 글씨 가득한 내 충혈된 안구(眼球)여 

                    - 「꿈에 시를 쓰면 불길하다」/이창기

 

 이 시의 화자는 시인. 그래서 더욱, 이 시를 쓴 시인과 동일한 인물일 것이라고 유혹되겠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낙착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작품이 시인의 삶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작중으로 전이되는 사물과 정황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과 각도는 아무래도 시인의 그것과 닮아 있지만, 다루는 사정과 사연은 시인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미학과 구성에 따라 확대와 축소만이 아니라 대체와 은닉도 가능하고 바람직하다. 시의 이런 속성은 시가 현실에서 촉발되지만 상상의 허구이면서 동시에 삶의 진정성을 일체로 추구하는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의 화자를 시인이 창조한 인물이자 시인의 탈이라고 불러왔다.   

 각설하고, 위 시의 시인 화자는 어느 날 꿈속에서 ‘설움’에 겨워 ‘엎드려’ 시를 쓰며 마음이 ‘톡톡 부러진다.’ 균열과 절상(折傷)의 아픈 정서가 환기되는 이 시. 사연은 막연하지만 이미지는 선명하다. ‘인질처럼/우두커니 말을 삼키던 사람들’. 굳이 부연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의 시선을 비롯하여 그 표정은 ‘말을 삼키’고 있었기에 화자에게 선명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모두 ‘아는 얼굴들’. 그런데 시인 화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처럼 시를 더 쓰지 못한다. 그러다가 안타깝게도 꿈에서 깨고 만다. 비몽사몽 와중에 화자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는데, 그들은 ‘하나, 둘, 사라진다.’ 

 이 단절에 무기력하지만 감내하기 어려운 화자, 현실로 돌아온, 아니 현실로 추방된 화자는 더 간절해진다. 그래서 쓰지 못했던 그들과의 사연과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려하지만 그럴수록 진척이 없자 ‘무릎 꿇고 써볼까’고 자신에게도 호소하다가, 그 사연에 관련된 자화상을 의식한다. ‘손자국 난 얼굴’. 그 자국은 지금 화자의 얼굴에 있지 않지만 그 언젠가 화자에게 자행된 폭력의 흔적이고, 강렬한 수모이며, ‘하나, 둘, 사라진’ ‘아는 얼굴’들과 아마 같이 겪었던 사연을 짙게 시사하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문득 ‘꿈에 엎드려’ 쓴 자신의 시를 화자는 본다. 자신의 ‘충혈된 안구’에 ‘가득한’, ‘붉은 글씨’의 문장들을. ‘제 발끝을 내려다보는 흉상(胸像)’과 같은 자신의 안구(眼球)에 비친. 

 마침내 화자가 본 그 문장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구의 어미에 서린 탄식에서 우리의 가슴도 그저 붉어지지만.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상상은 자유롭지만 꿈속의 화자처럼 모호한데, 이 자체가 이 시의 매력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화자에게처럼, ‘손짓하며’ 사라진 그 ‘얼굴’들이 있는지, ‘설움’에 겨워 ‘엎드려’ 쓴 시가 있는 지. 혹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발끝을 내려다보는 흉상(胸像)’과 같은 그 ‘안구’에 비쳐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랐을 것이다. 이 도저한 상실과 허망의 형상은 오직 작중 화자와 시인의 몫이다.    

 사족 : 소설가 후배가 첨부한 소감. “내가 보기에는 [이 시를 쓴 시인은] 푸르른 젊은 날과 달라진 얼굴이 없건만 남들 보기에는 백발 할배겠다. 하지만 남들이 뭐 언제는 내 얼굴 봐줬으리. 남은 남이지. 내 친구 얼굴은 내 친구 얼굴이어 좋다. 지금 내가 시인이라면, 저 3연 1행 ‘인질처럼’을 ‘인두처럼’으로 바꾸고 싶군. 아주 자극적으로. 그래서 소설은 인간을 자극하는 흉물이닷! (따라서) ‘시는 흉물이 아닌 척 하는 흉칙한 짐승이다! 짐승의 마음으로 쓰지 않는 시가 모두 이쁘지 않은 까닭이 거기 있다’고 나는 시를 이해한다!” 독자 여러분, 역시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배어있는 이 주장을 잘 참작하세요. 반어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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