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구 군은 나에게 세례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나 내가 감옥 간 후 그에게도 수배령이 내려 서강대학교의 예수회 신부님 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아마 예수회 신부님의 권면으로 가톨릭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임종하는 자리에서는 신부님을 부르지 아니하고 나를 불러 임종하는 자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살아 있었으면 대통령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재(人材)이었는데 지금까지 아쉬움이 깊습니다.

청계천 빈민촌 사역 시절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일본인 한 분이 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목사입니다.

어느 날 일본인 한 분이 청계천 빈민촌을 찾아 왔습니다. 나에게 명함을 주며 일본인 목사 노무라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연합회, NCC를 찾아가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소개하여 달랬더니 청계천 빈민촌의 김진홍을 찾아가라 일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수한 크리스천이었고 국경을 초월하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분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 영어 구사에 능통하였습니다.

나와 대화할 때는 나의 서투른 영어로 의사소통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사진 찍는데 도가 튼 분이어서 지금도 우리가 가진 청계천 시절의 사진들은 모두 그가 남긴 작품들입니다.

그렇게 길이 터진 후로 노무라 목사는 청계천 빈민촌 돕기에 지극 정성을 다했습니다. 일 년에도 두어 차례씩 방한하여 일본에서 배달학당 학생들이 사용할 학용품, 마을 유치원 아이들의 장난감 등등 온갖 선물을 가져와 선물 보따리를 풀었기에 항상 주민들의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내가 마을 안의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을 방문할 때 그와 함께 가서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드리곤 하였습니다. 그가 기도드릴 때면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기도드렸기에 내가 감동 받았습니다.

후에 나의 청계천 수기를 쓴 〈새벽을 깨우리로다〉가 출간되었을 때에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노무라 목사의 도움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제목의 책이 나오게 된 내력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나오기까지 노무라 목사의 도움도 쓰고 싶습니다.

빈민촌에는 환자가 유달리 많습니다. 거의 집집마다 환자 없는 집이 없다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 치료 받고 점심 사 먹이고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빚이 쌓였습니다. 빚에 쪼들려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CBS 기독교 방송국에서 일천만원 상금을 걸고 신앙수기 모집하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난 눈이 번쩍 열려 "이 상금은 내꺼다. 이 상금 받아 빚을 갚아야지."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 날로 나는 평소에 써 두었던 일기장을 들고 한 여관을 찾아갔습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머물며 800장 원고를 썼습니다.

책 제목을 정하기를 시편 57편 8절의 말씀을 따라 〈새벽을 깨우리로다〉로 정하고 기독교 방송국으로 발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천만원 상금을 사용할 목록까지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발표하는 날에 당선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습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진 나는 일천만원 받아 사용하려고 기록하여 두었던 종이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실망한 맘을 추스르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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