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전경. (사진=화성시)
융건릉 전경. (사진=화성시)

화성시가 지난 4일 기준 인구 100만63명으로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전국 5번째 100만명 기초지방자치단체가 됐다. 내년 말까지 인구 100만을 유지할 경우 2025년 1월 전국에서 5번째 특례시가 되는 것이다.

2001년 21만 명이었던 화성시가 22년 만에 80만 명이 늘어난 100만 인구 달성 도시가 된 것은 명실상부한 명당(明堂)으로서 이미 예견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당은 음택(陰宅, 무덤)과 양택(陽宅, 사람이 사는 집터)으로 구분한다. 

화성의 융·건릉은 음택으로 후손들이 복을 받는 명당이다. 실제로 화성시는 발복(發福)이 시작돼 100만도시를 넘어 거대도시의 기틀이 만들어졌고, 대한민국의 성장을 주도하는 고을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수원부 지도(해동여지도) 1735년 제작. 꽃잎이 여러 겹(800개의 봉우리)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표현한 지도. 화산이 명당임을 잘 표현한 지도이다.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수원부 지도(해동여지도) 1735년 제작. 꽃잎이 여러 겹(800개의 봉우리)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표현한 지도. 화산이 명당임을 잘 표현한 지도이다.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명당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일컫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명당은 무덤이나 집터 또는 마을의 입지를 정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공간이다. 명당자리에 무덤을 쓰거나 집을 지으면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된다고 여기는 공간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융·건릉이 자리한 화성의 화산이 명당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은 1608년 2월 1일 선조의 사망 후 능침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총호사(總護使,장례를 주관하는 벼슬) 허욱이 선조의 능자리로 동구릉 내 건원릉(태조 이성계릉) 주변 다섯 번째 언덕을 추천했다.

그러자 좌의정 기자헌은 동구릉에 능침 쓰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조상의 분묘 가까이에 묘를 쓰면 자손에게 재앙(후손이 죽는다)이 미친다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를 제시하자 대신들도 건원릉 주변에 선조의 능침을 정하는 것을 고집하지 못했다. 

선조의 능침은 기자헌의 제안대로 수원부 읍치로 결정됐다. 선조의 능침이 결정되자 첨지 최철견은 기자헌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말이며 수원부는 멀고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목릉(穆陵)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 1608년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성했다가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의인왕후의 유릉과 합장하고, 1632년 인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했다. (사진=문화재청) 
목릉(穆陵). 선조와 의인왕후(반남박씨)·인목왕후의 능. 1608년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성했다가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의인왕후의 유릉과 합장하고, 1632년 인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했다. (사진=문화재청) 

상반된 주장에 광해군은 수원이 길지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곳에 능침을 정할 경우, 산성 철거와 읍치와 민가 이전의 어려움 등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예경(禮經)’에 ‘살아서 사람에게 유익한 자는 죽어서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구절 등을 고려해 선조의 능침을 건원릉의 다섯 번째 언덕으로 결정함에 따라 4개월의 논쟁 끝에 ‘목릉’이 조성됐다.

화산이 명당으로 다시 거론된 것은 1659년 5월 4일 효종 사망 후다. 효종의 능침으로 화산이 다시 거명되면서부터 조선의 최고의 명당 중 하나로 인식됐다.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사돈인 심지원이 총호사에 임명됐다. 심지원은 풍수에 해박한 윤선도와 이원진, 예조판서 윤강, 관상감제조 이응시를 능침 선정에 참여시켰다.

이들은 열다섯 곳의 산을 살펴본 후 윤강과 이응시가 ‘현종’에게 수원 산이 가장 ‘진선진미(盡善盡美, 완전무결함)’하고 ‘천재일우(千載一遇, 천년에 한번 만난다는 뜻)’의 길지라고 보고했다. 뒤이어 심지원과 윤강은 능침으로 적당한 곳은 여주의 홍제동과 수원의 산 두 곳이라고 최종 보고했다. 현종은 여주의 홍제동보다 수원 쪽에 의중을 두었다.

그런데 송시열이 수원 능침 선정에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첫째, 수원은 국가의 관문(關門, 국경이나 요새에 세운 문)으로써 선왕께서 유의하던 곳이므로 하루아침에 철거하여 군민들로 하여금 살 곳을 잃게 하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다.

둘째, 길지를 택함에 있어 거리가 멀고 가까움은 구애되지 않으므로 홍제동이 가장 좋다.   

셋째, 수원의 형승이 지금은 비록 잠시 피폐하나 뒷날에는 관방(關防, 나라를 지킴)이 될 것이며, 정자(송나라때 유학자)가 오환(五患, 근심, 걱정, 고통, 재난, 병)을 논했는데 성곽을 가장 꺼리었다고 주장했다. 

여주에 위치한 영릉(寧陵). 1659년 건원릉 주변에 능을 조성했는데 석물 파손이 계속되자 1673년(현종 14) 여주에 옮겨 조성했다. (사진=문화재청)
여주에 위치한 영릉(寧陵). 1659년 건원릉 주변에 능을 조성했는데 석물 파손이 계속되자 1673년(현종 14) 여주에 옮겨 조성했다. (사진=문화재청)

이에 윤선도는 산의 우열만으로는 홍제동이 제일이고, 다음이 건원릉이나 홍제동의 흠은 거리가 먼 것뿐이라고 했다. 논의 끝에 현종은 수원은 가깝고 흉해가 없다며 효종의 능침을 수원으로 결정했다. 곧이어 조정에서는 500채의 가옥을 헐고 경작을 못하게 될 밭 700결의 문제와 읍치 이전 장소를 고등촌으로 옮기기 위해 산역(山役)에 착수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수원이 ‘오환(五患)의 땅’이라면서 "국초에 무학이 건원릉의 열두 산등성이가 모두 쓸 수 있다고 하였음을 일찍이 이항복도 논의드린 일이 있으니 다시 간심(看審, 잘 보아 살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조정대신들은 송시열의 주장에 찬동하게 되고, 이조판서 송준길은 "우리나라 비기(祕記, 길흉·화복을 예언한 기록)에 나라에 일이 있으면 수원에서 변이 일어나고 기보(畿輔,서울주변)와 나라 안이 어지럽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때문에 모두 걱정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운명’에 불안한 인간의 약점을 파고든 논리를 제시하자 현종은 최종적으로 효종의 능침을 ‘건원릉’으로 결정하여 1659년 묘역을 조성했으나, 이후 1673년 묘 자리를 옮겨 여주에 영릉(寧陵)을 조성했다. 

현종은 수원산이 국릉(國陵)의 장부에 편입됐음을 밝히며 산세를 보존할 것을 명했다.

"수원은 지금 비록 쓰지 않더라도 이미 원릉(園陵)의 장부에 편입시켰으니 혈도(穴道) 근처에 나무를 많이 심고, 또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두 번째의 논쟁도 무의로 돌아갔다.

릉원침내금양전도(陵園寢內禁養全圖). 건릉지에 수록된 건릉 능침 내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능침의 범위를 규정한 그림. 수원부(해동지도)지도 중 구읍치가 위치한 부분(융릉, 건릉, 용주사, 화산, 독산성 등)이 표기돼 있다. (자료=수원시)
릉원침내금양전도(陵園寢內禁養全圖). 건릉지에 수록된 건릉 능침 내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능침의 범위를 규정한 그림. 수원부(해동지도)지도 중 구읍치가 위치한 부분(융릉, 건릉, 용주사, 화산, 독산성 등)이 표기돼 있다. (자료=수원시)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1776년 3월 10일 조선 22대 왕으로 즉위하나 38세가 되는 1789년(정조 13)까지 후사를 이을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정조의 고모부 금성위 박명원은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의 묘를 조선의 최대 길지인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할 것을 상소했다. 정조는 고모부의 상소를 적극 받아들여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에 앞서 수원부 화산에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는 구읍치와 관아시설, 민가를 옮겨야 했다. 이와 관련 반계 유형원은 북쪽 평야의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조성하면 장래 1만호의 대도회지로 발전할 것임을 반계수록에서 논한바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는 고모부 금성위 박명원과 유형원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10월 7일 화산으로 이장하고,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조성했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790년 6월 18일 드디어 조선23대 왕 순조가 태어났다. 수원부의 화산이 명당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정조는 수원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화성을 축조하는 등 화성의 부흥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이어진 화성은 1795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수원으로 다시 환원됐다. 1949년 수원읍이 시가 되고 외곽지역은 1793년 정조가 명명했던 화성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화성(華城)은 중국의 요(堯)임금에게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화(華)의 지방을 일컫는 표현으로 '화성에서 태평성대를 이루어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화성명칭 사용 230주년 만에 100만 도시 달성은 거대도시로 가는 길목이다. 

화성시는 명당의 요소인 지리적인 장점, 특히 광활한 토지 자원을 치밀한 도시계획을 통해서 잘 활용함으로써 꿈의 도시 화성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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