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1월 24일 능행을 마치고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정조대왕은 채제공의 보고를 받았다. 숙지산에서 화성 축성에 사용할 수 있는 돌이 많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 때 정조대왕의 반응이 ‘화성성역의궤’(부편2-연설 편)에 기록돼 있다.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면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孰知)라 했으니, 예로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 왔는데 오늘날 홀연히 셀 수 없이 돌이 나와 축성의 재료가 되게 하여 돌이 없게 될 것을 누가 미리 알고 그런 이름을 붙였던가. 이는 아득한 예전에 미리 정해 놓은 바가 있었음이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호 옆 숙지산이 있는 지역의 당시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다. ‘빌 공(空)’자, ‘돌 석(石)’자다. 채석작업이 시작되면서 돌이 비워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숙지산은 ‘숙(孰)’자와 ‘지(知)’자를 쓴다. 예전엔 ‘익힐 숙(熟)’자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익히 알았다’는 뜻이다.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익히 알았다(熟知)’니...

화성 축성 종합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부석소에서 캐낸 돌은 숙지산 8만1100덩어리, 여기산 6만2400덩어리, 권동 3만2000덩어리, 팔달산 1만3900덩어리 등 18만9400덩어리다.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지난 주말 (사)화성연구회는 번암 채제공(1720~1799) 선생의 출생지인 충남 청양군으로 가을 답사를 다녀왔다. 가는 길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사당과 다산 정약용선생이 찰방으로 있던 금정역도 들렀다. 오는 길에 용인 번암 묘소도 들르기로 했으나 초겨울 해가 짧아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번암 채제공 선생의 사당인 상의사를 찾은 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김우영)
번암 채제공 선생의 사당인 상의사를 찾은 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김우영)

최익현 선생 사당인 모덕사에 이어 찾아간 곳은 번암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 상의사였다. 이곳에서 번암 선생의 6대 후손과 청양군청 문화재 담당 공무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일행은 번암선생의 영정 앞에서 예를 표한 후 후손의 설명을 들었다. 후손은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찾아온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상의사에 있는 영정은 진본이 아니며 진본은 수원화성박물관에 가 있다”면서 “문중에서 비용을 낼 테니 모사본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후손들은 지난 2020년 6월 22일 보물 제1477-2호로 지정된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과 보물 제1477-3호인 ‘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 등 유물 1854점을 수원시(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번암 선생은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수원화성 축성 당시 총리대신으로 활약했다. 1793년 재상으로써 초대 화성(수원) 유수로 임명받아 수원으로 이주해 살았다. 수원으로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번암 채제공 선생 출생지 구재리 어저울마을. 오른쪽 붉은색 함석 지붕이 번암 선생 출생터다. (사진=김우영)
번암 채제공 선생 출생지 구재리 어저울마을. 오른쪽 붉은색 함석 지붕이 번암 선생 출생터다. (사진=김우영)

채제공의 출생에 대한 신화와 같은 전설도 재미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에게 밤마다 이물(異物)이 찾아왔다고 한다. 하루는 명주실을 이물의 옷자락에 꿰어 놓고, 다음 날 실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있었다. 그 후 10개월이 지나 낳은 아이가 채제공이라는 것이다.

출생 전설의 배경인 그 마을도 다녀왔다.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 어저울마을이다. 같은 구재리 동줏말에 있는 사당인 상의사에서 멀지 않은 아늑한 마을이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날씨임에도 이 마을은 포근한 느낌이 들 정도로 따듯했다. 과연 당대를 풍미했던 채제공이란 인물이 태어날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가터 앞에는 우물이 있고 그 앞에 시멘트로 수조를 만들어 놓았다. 마을 빨래터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암 출생 당시 먹을 물이 없을 정도로 가물었는데, 채제공이 태어나자 우물에서 물이 펑펑 솟았다는 전설이 있다.

가만, 그런데 이 지역명이 화성면이라니...어찌 이런 인연이 있을까?

번암은 화성 축성의 총 책임자인 총리대신이자 초대 화성유수를 맡아 성 쌓는 일을 총괄했다.

그런데 그가 출생한 곳 또한 화성이었던 것이다. 한자는 다르다. 수원의 화성은 ‘화성(華城)’이고 청양의 화성은 ‘화성(化城)’이다.

앞에서 정조대왕이 한 말처럼 ‘아득한 예전에 미리 정해 놓은 바가 있었음이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화성축성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 사당인 상의사 가는 길에 ‘화성중학교’가 있다. 정조대왕의 말처럼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진=김우영)
화성축성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 사당인 상의사 가는 길에 ‘화성중학교’가 있다. 정조대왕의 말처럼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진=김우영)

정조대왕은 1799년 번암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몸소 애도의 글을 지어 내렸다.

‘여우와 쥐 같은 자에게는 도끼와 톱 같고 충신과 어진 이에게는 해와 별 같이 하였도다’

이 글은 용인에 있는 채제공 묘 옆 ‘채제공선생뇌문비’에 새겨져 있다. ‘뇌문(誄文)’이란 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고 공적을 기리는 글이다.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 “경(채제공)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 “조정에 노성(老成:채제공)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라고 극찬하는 내용도 뇌문비에 들어있다.

임금이 직접 뇌문을 지어 내리는가하면 전설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민초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인물이 바로 번암 채제공 선생이었다.

가을빛이 쇠락해가는 답사길에서 만난 번암 선생의 흔적 역시 쇠락해 쓸쓸했다. 출생 당시 집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타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다.

집터나 마을 입구에 비석이라도 하나 쯤 세워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희·류성룡·이원익·김육 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5대 명재상으로 꼽혀지는 채제공 선생을 배출한 마을이니만큼 자랑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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