뎡리의궤 화성전도. (자료=수원시)
뎡리의궤 화성전도. (자료=수원시)

올해는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이름을 바꾼 지 230주년이 되는 해다. 중국의 요(堯)임금이 화(華)지방을 순찰할 때 화(華)의 봉인(封人)이 장수(壽), 부귀(富貴), 다남자(多男子)의 세가지를 축원(祝願)한 뜻을 기려 '화성(華城)'이라고 고을 명을 지었다. 화(華)의 지방 봉인(封人)의 축원대로 정조는 조선을 요(堯)임금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바램을 수원 화성에서 이루고자 함이었음이라.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이름을 바꾼 역사를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의 등장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조성된 양주 배봉산의 영우원(사도세자의묘)은 명당이 아니어서 인지 정조는 임금이 된지 13년이 될 때까지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를 걱정한 고모부 금성위 박명원은 1789년 7월 11일 어전회의에서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으로 이장할 것을 상소하게 된다. 

당시 수원읍치 뒷산인 화산은 선조, 효종의 능으로 거명될 정도로 조선의 최대 명당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선조와 효종의 능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이유는 능자리가 수원 읍치여서 관아와 민가 등을 이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능원침내금양전도. 건릉지 권1, 원침 뒷산의 이름을 화산이라 적었다. 800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꽃의 모양이라고 정조는 표현했다. (자료=수원시) 
능원침내금양전도. 건릉지 권1, 원침 뒷산의 이름을 화산이라 적었다. 800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꽃의 모양이라고 정조는 표현했다. (자료=수원시) 

이후 1670년에 반계 유형원은 수원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팔달산 자락으로 읍치를 옮기면 장래 1만호의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반계수록’에 기록했다. 정조는 반계수록의 내용을 적극 수용했다.

정조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묘 이장과 함께 신읍조성을 결정하게 된다. 현륭원 조성은 구읍치 민가 이주로부터 시작됐다. 현륭원 조성과 신읍조성이 완료된 다음해인 1790년 6월 18일(정조14) 아들 순조가 태어났다. 당시 이러한 현상은 사도세자 묘가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신읍에 성곽 축조를 건의하는 신하들이 많아지자 정조는 성곽건설을 결심하게 된다. 성곽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설계는 물론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설계는 젊은 학자 정약용에게 맡겼다. 예산은 왕실예산인 내탕금을 사용하기로 한다.

정약용의 성곽설계가 완료되자 정조는 본격적으로 성곽공사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수원부의 지위를 격상하는 일이었다.

정조실록 1793년 1월 12일자 기사. (자료=한국고전번역원)
정조실록 1793년 1월 12일자 기사. (자료=한국고전번역원)

1793년 1월 12일 수원부의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지위도 부사 3품에서 정2품 유수부(留守府)로 격상하는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화성유수는 정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整理使)를 겸하게 하고, 경기감사가 화성유수를 겸하게 하는 개편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유수를 보좌하는 5품 판관(判官)을 두게 했다. 이날 좌의정 채제공을 초대 유수로 임명했다.

정조실록 1794년 1월 15일자 기사. (자료=한국고전번역원)
정조실록 1794년 1월 15일자 기사. (자료=한국고전번역원)

수원부(水原府)의 명칭을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로 바꾼 연유를 ‘정조실록 1794년 1월 15일’ 자 기사에 적고 있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00 개의 봉우리가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정조가 수원을 화성으로 바꾼 뜻은 중국 요(堯)임금 때 화(華)의 땅 봉인(封人)이 장수(壽), 부귀(富貴), 다남자(多男子)의 세가지를 축원(祝願)한 뜻을 기려 『화성(華城)』이라고 고을 명을 취한 것이다.

정조는 요(堯)임금 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했다. 

즉, 모든 백성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되고, 큰 고을로의 발전을 수원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떨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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