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은 조선의 제 17대 임금이다.

역사는 그를 비교적 똑똑한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치적을 살펴 보자.

임금에 오르자마자 '북벌(北伐)'로 일컬어지는 청나라 정벌계획 아래 의욕적으로 군사를 조련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전라도와 충청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공납(貢納)의 폐해를 줄여주는 등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줬다. 

대동법이란 조정에 내던 각 지방의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대신하도록 한 제도다.

또 새로운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 유통시켜 상공업 발달을 도모했다 하니, 역사의 그같은 평가가 결코 괜한 소리는 아니다.

효종은 분명 그처럼 성군(聖君)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타고난 자질도 출중했고, 새 임금에 거는 백성들의 기대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불과 20여 년 사이에 정묘.병자호란 등 두 차례나 혹독한 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마음과 삶은 이미 피폐할대로 피폐해 있었다.

그런데 왜 효종은 미처 다 피지도 못한 채 일찍 지고 말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 단서가 될 만한 아주 중요한 사건과 맞닥뜨린다.

바로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1654년(효종5년) 임금의 구언(求言)에 응해 올렸던 이른바 '강빈신원소(姜嬪伸寃疏)'이다.

8년 전인 1646년(인조24년) 역모죄로 사사(賜死)된 姜嬪(소현세자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였다.

효종은 이 해 전국 각지에 심한 가뭄과 홍수가 발생하자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렸다.

구언은 나라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생기면 자신의 부덕(不德)을 탓하면서 백성들에게 두루 조언을 구하던 군주의 통치행위다.

구언에 응한 말들은 그 내용이 역모 등 심히 중대한 것이 아닌 한,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는다는 게 하나의 불문율(不文律)이었다.

그런데 효종이 화가 난 나머지 이 불문률을 깨고 말았다. 

군주의 위엄과 약속마저 저버린 채 김홍욱을 잡아들여 친국(親鞫)을 열었다.

석연찮은 차자 상속이란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건드린데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었다.

늦여름 무더위 속의 친국은 참혹했다.

효종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으나 김홍욱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며 "왜 바른 말을 하지 않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그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 김육(金堉), 대사간 유경창(柳慶昌) 등이 "구언을 형률로 다스림은 임금의 덕에 누가 된다"며 간곡히 만류했으나 효종은 막무가내였다. 

우의정에서 물러나 와병중이던 원로대신 구인후(具仁垕)는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전하께서 국사를 말하는 신하를 죽이고자 하시는데, 후세에 전하를 비방히는 말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라며 담대하게 맞섰다. 그러면서 "역적과 공모한 김홍욱을 구하고자 했으니, 신 또한 마땅히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달게 받겠다"며 버티다가 파직을 당했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구인후의 뒤를 이어 사직을 청했지만, 효종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다.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피난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승지와 간관으로 가까이서 효종을 보좌했던 김홍욱은 형신(刑訊)을 받은 지 5일 만에 허무하게 생을 마친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나 대학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선생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한껏 지혜와 경륜을 뽐낼 52세의 나이에 한스러운 죽음을 앞에 두고 내뱉은 그의 몇 마디 말이 참으로 준엄하고 섬뜩하다.

"옛날부터 (구언에 응해)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던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문에 걸어두면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겠다."

그의 저주였을까. 그 후과(後果)는 참으로 무서웠다.

그의 억울한 죽음 이후 민심은 더욱 흉흉했다.

많은 백성들의 뇌리속에  여전히 잠재돼 있던 강빈의 원통한 죽음이 이 사건과 맞물려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조정 신료들과 사대부들 또한 효종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홍문관 수찬 홍우원(洪宇遠)은 이 해 또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강빈의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된다.

무엇보다 뼈아픈 점은 효종의 필생의 소원이었던 북벌의 꿈마저 식어버린 것이다.

군비 확장에 따른 세금 부담이 늘어나자 북벌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하소연이 빗발쳤고 이를 지켜본 사대부들도 북벌불가론에 힘을 실었다.

당시 조정의 실력자로 북벌을 노래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도 내심 소극적이었다.

북벌은 전후 찢겨진 민심을 추스리는데는 큰 효과가 있었지만, 찬찬히 따져 보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다.

청나라의 국력이 명을 멸망시킨 이후에도 계속 강성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벌이 무산되자 효종의 등등했던 기세는 급격히 꺾였다

김홍욱이 비명에 간 지 5년 만인 1659년 짧은 10년의 치세(治世)끝에 갑자기 승하한다.

부왕(父王)인 인조가 왕이 되기 4년 전인 1619년에 태어났으니, 40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병자호란의 여파로 17세에 청나라에 잡혀가 심양(瀋陽)에서 7년간의 볼모생활을 하는 등 일찍이 굴욕과 신고(辛苦)를 겪었던 효종이다.

예로부터 군주가 반드시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꼽는다면, 그것은 냉철한 이성과 풍부한 감성이다.

이성과 감성이 살아숨쉬는 곳엔 독선과 불통, 편견과 고집이 설 자리가 없다.

효종은 바로 이 두 가지를 간과했다.

이것이 바로 패착의 원인이다.

30대 초반의 혈기에 절대군주의 무소불위한 우월감이 더해지면 작은 분노도 제어하기 어려운 분노조절장애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김홍욱사건도 빚어지고 덩달아 민심도 이반하는 연쇄파장을 낳았다고 해도 비약은 아닐 것이다.

화(禍)는 혼자 오지않고 한꺼번에 겹쳐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성은 평형(平衡) 또는 균형감각이다. 

공정과 공평이 행해지는 원천이다. 

감성은 끊임없이 소통을 창출한다.

조선시대 어법으로 말하면, 이성은 중(中)이요, 감성은 화(和)다.

중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천하 만물의 근본을 말함이다.

화는 두루 섞인 듯 조화하며 어디에도 통하는 보편적인 도리다. 동시에 여기엔 절제가 뒤따른다.

이 중과 화를 온전히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해지고 발전한다고 했다.

 노자(老子)도 '빛이 있으면 빛에 섞인 듯 조화하고, 티끌에 있으면 티끌과 함께한다(和光同塵)'며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강조했다.

이성과 감성은 늘 잡되지 않지만 따로 떨어지지 않고 조화하며 함께하는 수레의 두 바퀴다.

중과 화 또한 그렇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자는 늘 이를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