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기적비. 수원시가 1991년 11월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화성성역의궤의 글(정리자)을 집자했다.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전서체로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기적비. 수원시가 1991년 11월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화성성역의궤의 글(정리자)을 집자했다.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전서체로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기적비문’은 화성의 축성 연유를 기록한 비문이다. ‘화성성역의궤’ 권1연설(筵說,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자문하고 답하는 자리에서 임금의 물음에 대답한다는 뜻)을 보자.

1796년 9월 10일 ‘영춘헌’에서 ‘화성유수’ 조심태가 정조께 화성축성의 완공을 보고하자, 조심태에게 하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하나의 작은 다리를 건립하였어도 오히려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였다. 하물며 이번 성역은 일이 크고 공역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소중함이 자별하니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 조심태가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돌을 다듬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조대왕은 “그러면 속히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봉조하 김종수에게 명해 글을 지어 올리게 했다. 김종수는 1797년 1월에 '화성기적비문’을 지어서 올렸다.

이후 ‘화성기적비’의 제작 유무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실물 또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수원시는 1991년 11월 ‘화성기적비’를 제작해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정조 당시 제작된 ‘정리자’로 인쇄된 ‘화성성역의궤’의 비문을 집자해 새겼다. 비석 상단의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글을 썼다. 당시 제호 글씨 작업을 필자와 함께 했음을 ‘김충영 수원현미경 62회 장안문 현판은 소형 양근웅 선생의 작품이다’에서 밝힌 바 있다.

정조대왕의 덕에 조선시대 의궤의 꽃인 ‘화성성역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남았으며, ‘정조실록’, ‘일성록’, ‘수원부하지초록’, ‘승정원일기’, ‘홍재전서’, ‘장용영고사’, ‘반계수록’, ‘여유당전서’ 등 수많은 기록이 있다. 화성관련 기록을 모두 읽기란 어려운 일이다. 혹여 읽었다 하더라도 모두 이해하기 또한 어렵다. 

수원화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독자들에게 압축적으로 수원화성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화성기적비문’을 몇 번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화성기적비문은 화성의 시작부터 완공까지 3000여 자로 요약된 명문이다. ‘화성기적비문’을 읽은 분은 분명 화성에 대해서 환히 눈이 열릴 것임을 확신한다.

‘화성기적비문’, 화성성역의궤 권2 비문에 1106자가 실려 있다. (자료=수원시) 
‘화성기적비문’, 화성성역의궤 권2 비문에 1106자가 실려 있다. (자료=수원시) 

화성기적 비문(전문)

정조13년(1789)에 우리 현륭원을 수원부의 화산으로 옮기고 그 읍치를 유천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1790년에 원자(순조)가 태어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93년에 임금께서 수원에 거둥하시어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킬 것을 명령하여 체모(體貌)를 높였고 행궁을 두어 우러러 의지할 뜻을 나타내었다. 

또 수원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으니, 원침은 한강 남쪽에 있고 영부(營府)는 원(園)의 북쪽에 있어서 원침(園寢)을 막아 지키는 방법으로 이 사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규모와 제작은 모두 임금의 뜻에서 나왔고 계획과 기율도 모두 임금의 결단을 따랐으니 유사(有司)는 명령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른데 불과할 뿐이었다.

임금께서 교서(敎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사업은 경기도와 호서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천 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게 해주는 것으로 힘써야 할 것이요,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공사를 감독 하는데 중요한 것은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 사람의 인중기와 기중기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 하도록 하라.

재물을 모으는 방법은 그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 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김종서)이 논한 것을 취하라 하였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한결 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가히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 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다. 

1794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가을에 이르러서 공사를 끝마쳤으니 그 기간이 모두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지 공사에 소요된 기간은 겨우 28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아! 3년 동안 공사하는 사이에 두루 수많은 화살을 막아낼 성곽을 쌓는데 성공하였으니 신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에 우리 성상의 신묘한 계획과 묘한 운영 방법이 보통의 갑절이나 뛰어났음을 우러러 볼 수 있겠다. 

성의 둘레는 무릇 4600보이니 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 그것은 유천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한 것은 원묘가 화산에 있으므로 화(花)자와 화(華)자가 서로 통하는데서 취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華) 땅 사람이 성인에게 축원한 뜻도 포함한 것이니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성의 문은 4개가 있으니 북쪽은 장안문이요 남쪽은 팔달문이며 동쪽은 창룡문이요 서쪽은 화서문인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바로 우리 성상이 해마다 선침에 배알(拜謁)하는 연로(輦路)로 한양성과의 거리가 70리이다. 

산이 둥그스름하게 솟아서 성의 진산(鎭山)이 된 것은 팔달산이다. 팔달산 정상에 장대가 있는데 그 위에 올라보면 멀고 가까이에 산봉우리들이 둘러있는 것이 마치 뭇별들이 북극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산으로부터 내려와 창룡문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올라 서쪽으로 가면 또 장대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공심돈, 각건대, 화양루, 포루, 각루, 암문, 용도, 옹성, 벽성, 노대, 등이 있는데 모두 그 지세를 따라 쌓은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옛말에 이른바 용두의 위에 있는데 용연이 그 북쪽에 있다. 이것이 성부(城府)의 대략이다. 재물이 80여 만금이나 들었고 인부가 70여만 명이나 들었는데 이것은 모두 왕실의 사재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계획한 것이다. 

돈으로 군정(軍丁)을 사서 성역에 나가게 하여 번거롭게 징발 하지 않았다. 또 거중기와 유형거를 사용한 것은 운반하기에 편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며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짓고 호(壕)를 파서 지키게 한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 

겨울에는 옷을 주고 여름에는 약을 나누어 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함이요 혹시 흉년을 만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한 것은 깊이 백성을 걱정하신 것이다. 아아! 성왕의 정치는 쓰기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릇 시행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국고를 바탕으로 하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부역에 임하나니 국비로 경영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이래로 밝고 의로운 성상들이 이미 행하여 왔던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다. 

오직 우리 전하는 지혜가 하늘과 같아서 비용은 쌓아 두었던 재물로 경영하였고 인부는 모두 품삯을 주고서 부려 국용(國用)은 털끝만큼도 허비됨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3일의 부역도 면하였다. 

때에 알맞게 절제하였고 멀리서 가져오고 가까이에서 이용하여 열리지 않은 지리를 일으켰으며 함락되지 않을 금성탕지(金城湯池)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진실로 삼대의 융성할 적에도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업에 있어서 한 명령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뜻에 거스름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일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힘을 해침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은 진실로 과거에 우리 성상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연로의 곡식 싹도 밟지 않으신 것을 본받은 것이니 비록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기가 마치 벌레와 같은 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무궁하신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뭇 장정들이 힘을 합하고 여러 공장(工匠)들이 앞서서 일하여 이 길고 넓은 우뚝한 성을 쌓아 길이 억만년에 천지가 다하도록 선침을 호위하고 행궁을 보호하며 서울의 날개가 되어 엄연히 경기주변의 큰 진(鎭)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아! 엄숙한 행궁에 현륭원이 매우 가까이 있어 어진을 받들어 사모함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큰 성인의 무궁한 효가 실로 국물만 보아도 모습이 보일 듯한 데서 나온 것이다. 상상컨대 백세의 뒤에도 전하의 효도에 감동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늙고 천한 신이 하늘보다 끝이 없는 지우(知遇)를 받았음에 있어서랴! 

정조 21년 1797년 정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 김종수는 교서를 받들어 짓다.
 
(본 화성기적비문은 수원화성박물관 역사자료총서 '3.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기념출판 화성성의궤 역주'의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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