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姜弘立.1560-1627)은 조선 광해군 때 문신 출신의 도원수다. 명(明)나라의 출병 요청으로 1619년(광해군12년) 조선의 대규모 정예병력을 이끌고 명과 함께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패장이다. 

당시 요동에서는 명나라군 10만에 조선군 약 1만3천 명, 후금군 6만이 어우러진 큰 전쟁이 벌어졌다. 급조된 명군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전멸하다시피 했다. 강홍립의 조선군 또한 힘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눈치만 보다가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 바람에 좌영군을 이끌고 심하(深河)에서 철기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였던 조선의  명장 김응하(金應河)장군의 투혼도 빛을 잃었다.

이 지경이었으니 역사도 아예 그를 오랑캐나 역적으로 낙인찍은 모양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지거나 항복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색이 조선의 도원수인 그를 이처럼 가혹하게 매도하진 않는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항복은 그의 주장대로 ’형세를 보고 향배를 정하라’는 임금의 밀지때문이었다고 치자. 

문제는 그 이후 8년  동안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총애속에 호의호식하며 살아 남기 위해 보여줬던 그의 구차하고 교활한 행적이다. 

그 가운데 ▲투항 직후 후금의 조선 양반 출신 군관 4백여 명 참수를 방관한 것 ▲조선으로의 탈출을 모의하고 이를 미리 알려준 항왜(降倭.임진왜란때 항복한 왜병)들을 누르하치에게 밀고해 몰살시킨 일 ▲명나라 장수와 밀통해 후금을 치려던 부원수 김경서(金慶瑞)를 역시 누르하치에게 고자질해 원혼을 만든 일 등은 오히려 약과다.

살기 위해 이토록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면 진퇴양난의 조선을 지켜내는데 큰 공헌을 했어야  마땅했음에도 그는 되레 정반대였다.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며 후금군 3만명을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해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도륙하며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정묘호란(1627.인조5년)의 주범이 되고 말았으니,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갑자기 조선 침공에 거품을 무는 그를 보고 누르하치조차 핀잔을 줬다고 한다. "하물며 옛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자신의 임금을 해치지 않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본국에 대한 복수심이 이리도 심한가?"(況古人至死不害其君 君何讐於本國之甚也)

매국노 한윤(韓潤)의 거짓말에 속아 자신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한 줄 알고 광분해 이처럼 결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강홍립은 이 해 봄 전쟁이 끝나자 조선에 눌러 앉았다. 조정과 백성들의 빗발치는 반대와 원성을 무릅쓴 인조의 배려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주위의 심한 멸시와 냉대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 자신의 뼈저린 후회와 자책, 비탄과 울분이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명줄마저 단축시켰다. 그 해 나이 68세. 조선으로 돌아온 지 반년 만이었다.

선영이 있는 난곡(蘭谷.지금의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자락에서 난을 키우다가  치욕스런 삶을 마감한 것이다. 도원수가 돼 요동으로 떠날 때 아들을 전송하며 당부했던 팔순 노모의 말씀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강홍립의 가슴엔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만일 국가대사를 그르치면, 그것은 임금을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조들에게도 큰 욕이 될 것이다."(若誤國家大事 不唯負君 其亦貽辱祖先大矣)

강홍립은 애초부터 도원수는 고사하고 장수 재목도 아니었다. 전쟁에 임할 담력도, 용기도, 죽을 의지도 없는 나약한 사대부일 뿐이었다.

그런 그를 단지 병서에 밝고 활 잘 쏘고 말 잘 탄다는 이유로 총애한 광해군의 섣부른 안목이 빚은 참사였다.

그로부터 약 4백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정부나 정치 언저리에 강홍립처럼 자질과 능력도 쳐지면서 과분한 지위를 누리며 국민세금을 축내고 있는 자가 얼마나 많을 지 심히 걱정된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반미와 친중을 외치며 제2, 제3의 강홍립이 줄을 이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구범회 전 언론인은?> 

용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싱가포르국립대 중국어 연구소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정치.사회.외신.해외.국제경제부 기자와 초대 북경특파원을 지냈다.

성균관 한림원에서 유학과 한문을 공부했으며, 현재 한송(寒松) 성백효(成百曉)선생 문하에서 고전을 배우고 있다. 

저서로는 지난 2011년 중국 당(唐)나라와 원(元)나라의 기독교에 관한 책인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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