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편곤의 자세 중 비전요두세(飛電繞斗勢)의 모습이다. 번개처럼 날아올라 두성(斗星)을 휘감듯이 마상편곤을 휘두른다. 말 머리 오른편 앞쪽을 공격하는 자세이다.
마상편곤의 자세 중 비전요두세(飛電繞斗勢)의 모습이다. 번개처럼 날아올라 두성(斗星)을 휘감듯이 마상편곤을 휘두른다. 말 머리 오른편 앞쪽을 공격하는 자세이다.

 

- 조선후기 기병의 필수 무기 마상편곤

 도리깨. 어릴 적 시골에서 콩 타작을 할 때 사용했던 농기구. 그것이 군사들의 무기인 편곤으로 발전했다. 늘 익숙하게 사용하던 농사 도구가 무기가 된 것이다. 그 무기의 변화 속에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기병전술의 한계를 느끼며 명나라에서 도입한 단병접전(短兵接戰)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청대(淸代)에 이르러서 병자호란을 비롯한 북방 이민족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서 빠른 기병전술이 다시금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일종인 관무재(觀武才)에서도 나타나는데, 조선후기 관무재의 시험과목에는 조선전기와는 다르게 실전적인 기추(騎芻)와 편곤(鞭棍) 등 다양한 기예를 시험보게 되었다. 

 조선후기 간행된 『병학통(兵學通)』의 진법들 중 용호영(龍虎營)의 진법과 전투시 기병의 전술을 살펴보면 마상편곤(馬上鞭棍)이 조선후기 기병들이 핵심 돌격무기로 인정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존 진법서(陣法書)에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 단독의 진법들이 『병학통』에 다양하게 수록된 것을 살펴볼 때 기병이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전술의 중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마상무예 변화를 살펴보면 이렇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기창(騎槍)이 선제 돌격전술에서 핵심무예로 인식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기창(騎槍)보다 빠른 회수력과 휴대의 간편성 때문에 마상편곤이 기병돌격 무예의 핵심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후기 기병의 기본 무장상태를 봤을 때도 확연히 드러나는데, 당시 기병의 기본 무장에 기본 방어 무기인 환도(環刀)와 원거리 공격무기인 궁시(弓矢) 그리고 돌격무기로 활용된 마상편곤을 반드시 갖추도록 명확하게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상편곤은 조선 후기 기병의 필수무기이자 무예로 인정받았다. 이런 이유로 기병에게 관에서 지급하는 물품에는 마상편곤이 기본 제공무기로 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을 살펴보면 기병부대인 용호영에 지급한 기본 물품에 대해, "관에서 급여한 군용 장비품은 금군 매명에 대하여 전립(戰笠) 1점ㆍ동개(筒箇) 1점ㆍ장전(長箭) 20본ㆍ편전(片箭) 15본ㆍ환도(環刀) 1점ㆍ마편(馬鞭) 1점ㆍ통아(桶兒) 1점ㆍ요구금(要鉤金) 1점ㆍ교자궁(校子弓) 1점ㆍ갑주(甲冑) 1점ㆍ편곤(鞭棍)이 1점인데 훼손되는 대로 매철 첫달에 교환해 준다."라고 하였다. 

 또한 기병 전문부대로 구성된 용호영에서 기병 단독으로 전술전개를 할 때, 활용하는 무기를 보면 당시 마상편곤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대 대표적인 진법서인 『병학통(兵學通)』에 실린 마상편곤 활용법을 보면, 당시 기병전술에서 마상편곤이 얼마나 중요한 무기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용호영(龍虎營)은 작전을 펼칠 때 적이 100보(步) 밖에 있으면 각각의 병사들이 상마(上馬:말에 올라 탐)하고 신호포 소리가 나면 일(一), 이우기(二羽旗)를 세우고, 점고(點鼓) 점기(點旗)하면 후층(後層)이 나와 전층(前層) 앞에 일자로 벌여 선다. 적이 100보(步) 안에 이르면 명령에 따라 궁시(弓矢)를 한꺼번에 발사하고, 적이 50보에 이르면 북을 빠르게 치며 천아성(天鵝聲)을 분다. 이때 (기병은) 편곤(鞭棍:마상편곤)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적을 추격한다. 적이 패하여 물러나면 징을 울리고 북이 멈추면 각 병사들은 제자리에 선다. 징소리가 세 번 울리면 즉시 몸을 돌리고 신호포 소리에 따라 해당 번기(番旗)를 세우고 안쪽을 향하여 깃발을 점(點)하면 원지(原地)로 되돌아온다. 또다시 적이 오는 상황이 되면 신호포를 쏘고 일(一), 이겸기(二兼旗)를 세운다. 북을 점(點)하고 깃발을 점(點)하면 전층(前層)이 일자로 늘어서고 적이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활을 쏘고 추격하고 물러나기를 앞의 상황과 동일하게 한다. 또 다시 적이 오는 상황을 만들어 신호포를 쏘고 일(一), 이내기(二內旗)를 세우고 북을 점(點)하고 깃발을 점(點)하면 중층(中層)이 전층(前層) 앞으로 나가 일자로 벌려서고 활을 쏘고 추격하기를 모두 전과 같이 한다."라고 하였다. 

 내용은 길어도 단순하다. 적을 향해 돌격할 때, 기병이 마상편곤을 뽑아 들고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전술을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후기 무과시험에 새롭게 마상편곤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조선군의 전술의 변화는 무기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강력한 청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의 변화는 곧 국제 정치와도 연결된 것이다. 무예를 통해 군사들의 신체변화를 연구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국제 외교의 부분까지도 엿볼 수 있다. 

- ‘적청(狄靑)’, 죽은 영웅은 필요해도 산 영웅은 필요없다

 『무예도보통지』의 마상편곤을 보면, ‘적청(狄靑)’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적청이 농지고를 정벌할 때, 한 밤 중에 곤륜관을 넘어 기병 2000여기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런데 적이 후방에서 표창과 방패로 무장하여 방어하자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마상편곤을 뽑아들고 돌진하니 그 방벽을 돌파했다는 내용이다. 정청은 1008년에 태어나 1057년에 죽은 중국 북송(北宋)의 명장이다. 아직까지도 중국인의 장수 위인전에는 항상 그가 등장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안타까운 그의 죽음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적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때 중국 TV시리즈로 명성을 알렸던 ‘판관 포청천’과 쌍벽을 이루는 북송(北宋)시기의 장수다. 포청천이야기에서 서슬퍼런 개 작두와 용 작두을 들어올리며,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공명정대한 법집행을 추구했던 포청천은 당시 백성들에게 ‘진정한 공정’이 무엇인지 몸으로 실천한 문관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무협이야기를 담은 『수호전』을 보면, "문곡성(文曲星)과 무곡성(武曲星)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는가!"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문곡성은 정의로운 판관인 포청천을 말하고, 무곡성은 용맹한 장수인 적청을 이르는 내용이다.

 좀 더 자세히 적청의 삶을 짚어보면 이렇다. 적청은 북송의 장수 중 가장 영예로운 사람이었다. 무인들이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추밀사(樞密使), 요즘으로 하면 국방부 장관을 지낸 장수다. 그런데 그의 시작은 흙수저였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제대로 공부를 익히지도 못했다. 심지어 16살 때에는 형을 대신하여 벌을 받아 얼굴에 죄인을 상징하는 문신을 새겨 군대로 끌려갔다. 자자충군(刺字充軍)이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038년 북송 주변에 서하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고 또 다른 이민족 황제가 등장한다. 당시 적청은 변방을 지키는 하급군관이었고, 서하와의 전투에서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단기필마로 수차례 서하군의 선봉을 박살내 버렸다. 그 전투 중 새로운 스승을 만나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금의 모든 병서를 모두 머리 속에 외워버렸다. 

 이후 적청은 25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가 출병한 전투는 단 한번도 패전이 없었다.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절대적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렇게 전공을 쌓아나가자, 황제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북방 이민족들이 북송을 위협하면, 그 선두에 적청이 나아가 모두 깨끗하게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1052년에는 드디어 추밀부사의 직까지 오른다. 일반 평민의 자제로 그토록 빠르게 승진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이후 북방은 완전하게 평정되었다. 이때 남쪽의 광주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적청은 서하와의 전투에서 함께했던 수백 명의 소수민족기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선발대로 보내진 북송의 부대는 거의 전멸당한 수준으로 심각한 전황이었지만, 적청은 곤륜관 지역에서 적의 두터운 방어벽을 부수고 끝까지 적을 추격하여 몰살시켰다. 그리고 난을 완전히 진압해 버렸다. 그때 사용한 무기가 바로 마상편곤이었다. 개선장군처럼 마상편곤을 어깨에 짊어지고 당당하게 수도로 돌아온 후 적청은 추밀사로 임명되었다. 국방관련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적청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적청은 늘 겸손하게 국가에 충성심을 나타냈고, 그의 품행이나 전공도 당시 일반백성들에게도 널리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다른 권력자들은 더욱 마음을 놓지 못했다. 특히 황제는 거의 완전무결할 정도로 뛰어난 적청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정도였다. 온갖 유언비어가 적청 주변에 쏟아져 들어 왔다. 심지어 적청이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엄청난 소문까지 횡행했을 정도였다.

 이후 조정은 그를 북송의 변방인 진주를 다스리는 진주지사로 발령을 내었다. 쫓겨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정기적으로 황제의 사신이 위로방문이라는 형식으로 그를 감시했다. 진주로 내려온 지 불과 반년도 안 되어 적청은 우울증과 정신병으로 병사해버렸다. 그의 나이 49세. 전장터의 맹장, 군사들의 꿈이었던 그가 시기와 질투를 견디다 못해 떠나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황제는 애도를 표하고 중서령의 관직을 추증했으며, 시호를 무양(武襄)으로 하였다.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함께 슬퍼했다. 어찌하겠는가. 치기어린 군상들이 가득한 그곳은 적청이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적청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송의 군사력은 최악의 상태까지 곤두박질쳤다.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가 없어서, 주변 이민족들에게 은과 비단을 바치며 간신히 버텨냈다. 찬란했던 중원의 문화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이후 북방의 여진족들은 날이 갈수록 더 거칠어져 마침내 금(金)나라를 세웠고, 한족의 명맥을 이은 북송은 말발굽 아래 멸망당했다. 그리고 적청은 한족들에게 전설 속 영웅이 된 것이다.

 어떤 이에게 살아있는 영웅은 거북한 존재다. 그래서 그 영웅은 죽어야 진정한 영웅으로 숭앙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의 사라짐은 나라 혹은 조직이 망가지는 시작이기도 하다. 콤플렉스, 열등감에 시달리면 시기질투에 눈이 멀어 매사가 꼬이게 보인다. 세상살이가 그런가 보다. 임진왜란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그가 만약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의 총탄에 죽지 않았다면 또 다른 정치적 총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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