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중 예도(銳刀) 편에 들어 있는 12번째 자세인 찬격세의 자세이다.(왼편)
“鑽擊勢者 卽鑽擊也法 能鑽格搶殺鵝形鴨步奔衝 左脚左手 白猿出洞勢 向前掣步 腰擊 看法”
해석하면, “찬격세(鑽擊勢)는 곧 비비어 치는 것이다. 이 법은 능히 비비는 격으로 훑어 살(殺)할 수 있는데, 거위 모양과 오리걸음으로 달리며 내딛을 수 있다. 왼다리와 왼손으로 백원출동세로 앞을 향하여 체보로 허리를 친다. 법을 보라.”이다. 
 동작을 설명하면, 그림처럼 찬격세의 자세를 취했다가 왼다리와 왼손을 사용하여 백원출동세를 하고 체보로 허리를 친다. 백원출동세는 찬격세 상태에서 오른발을 가볍게 들며 칼을 왼편 몸 뒷쪽 아래로 내렸다가 돌려(칼날을 앞을 향해 반시계 방향으로 감아 돌리듯이) 베듯 걸쳐 올려 왼쪽 어깨위로 들어 올리는 움직임을 말한다. 바로 이어 체보로 허리를 친다. 이렇게 두 자세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 예도를 넓게 바라보는 시각
 
 세상사는 무협지 속 세계가 아니다. 무협지에서처럼 고수의 칼 움직임 한 번에 수많은 적들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일은 결코 없다. 더 나아가 전장에서도 장수가 제아무리 칼날이 번쩍번쩍한 칼을 휘둘러도 적을 단 일격에 두 동강 내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갑주를 착용했던 것이다. 오직 철저하고 반복적인 기본기 수련 속에서 진정한 고수가 탄생하는 법이다. 

 조선의 날카로운 검법, 예도(銳刀). 

 거기에는 조선 검법의 기본이자 핵심이 담겨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무예도보통지』에는 두 가지의 예도(銳刀)가 실려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원래 예도는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24세의 낱개 검법(속칭 조선세법)과 조선군에서 이전부터 수련해온 연결된 긴 투로의 형태 두 가지가 존재했다. 앞의 『무비지』의 내용은 24세의 ‘예도보(銳刀譜)’로 정리되었다. 여기에 ‘예도총보’에 등장하는 독특한 4세를 ‘증(增)’으로 추가한 것이다.

 명나라의 모원의는 15년간 방대한 양의 병학(兵學)을 집대성해서 1621년에 『무비지(武備志)』를 펴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엄청난 애국심으로 똘똘뭉친 그는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일을 접고 오직 병학서 편찬에 몰두한 것이다.

 약 2천여 권의 병법서를 모두 살피며 직접 새롭게 정리하여 만든 것이 전체 240권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인 군기(軍器)부터 전투용 선박인 병선(兵船)을 물론이고, 군사들의 진법을 운용하는 진형(陣形)과 군사무예 훈련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 놓은 방대한 군사사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의 지도까지 담아 놓기까지 했다. 

 이런 백과사전적 자료이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을 쌓았을 때도 『무비지(武備志)』를 참고했을 정도였다. 그 내용 중 중국의 성곽 건설 부분을 집중적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이 인용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원 화성의 가장 높은 곳인 서장대 뒷쪽의 전투시설인 노대(弩臺)나 장안문 옹성 위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놓고 화공(火攻)을 방어하기 위한 오성지(五星池)가 그것이다.

 잠시 이야기가 엇나갔지만, 그렇게 중요한 책이기에 『무예도보통지』의 머리글 부분에 모원의의 일대기가 함께 수록되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원래의 『무비지(武備志)』의 인용문에서는 ‘호사자득지 조선기세법(好事者得之 朝鮮其勢法)’이라고 하여, ‘조선에서 그 세법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를 변용하여 뒷 문장에서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 칭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이것은 조선검술을 가져온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원의가 중국에서 새롭게 정리한 조선의 검법인 ‘조선세법(朝鮮勢法)’이 다시 ‘예도(銳刀)’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역수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는 표현보다는 ‘예도(銳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 편찬 이전부터 조선군이 수련한 긴 연결자세 방식은 뒤에 ‘예도총보(銳刀總譜)’라는 이름으로 따로 정리하였다. 일반적으로 『무예도보통지』 에 실린 다른 무예의 설명에서는 앞쪽의 낱개 보(譜)를 그대로 연결한 것이 마지막에 총보(總譜)의 방식으로 실려 있지만, 예도의 경우는 전혀 다른 검법처럼 ‘연결세(총보)’ 형태가 또 하나가 있는 것이다.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눈 크게 뜨고 살펴보면 보인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LA갈비’의 문화적 변용과 살짝 비슷하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을 간 재미 한인 1세대는 갈비가 그리웠다. ‘스테이크’라는 생고기를 그냥 구워주는 미국의 식문화와 넉넉지 않은 주머니사정은 ‘LA갈비’를 탄생시켰다. 절단기로 갈비를 조각조각 내어 한입에 먹기 좋게 다듬고, 밥반찬으로도 가능하게 양념에 절여서 만든 한국식 갈비가 미국에서 정리된 것이다. 

 칼로 하나씩 포를 떠야 하는 원래 한국식 갈비는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냥 절단기로  작게 짤라 버린 형태다. 그 과정에서 양념이 달콤 짭쪼름한 한국의 맛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구현하게 된 것이다. 이 방식의 소갈비가 한국에 다시 역수입되면서 'LA 갈비'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미국에서 구현된 한국의 맛인 'LA 갈비'처럼 중국에서 구현된 조선의 칼맛인 ‘조선세법’, 그것을 다시 『무예도보통지』에 ‘예도’라는 이름으로 넣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원래 조선군이 수련한 긴 검술을 마지막에 따로 ‘예도총보’에 담아 놓았다.

 모원의가 명나라 안에서 쓸만한 중국 검술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검법을 가져와 『무비지』에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조선세법’이라고 붙인 것이다. 거기에 원래 조선군들이 수련하던 ‘예도’와 기본적인 움직임이 비슷한 것도 있으니,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에는 두 가지를 함께 수록한 것이다.

 『무비지』에 정리된 조선세법(예도24세)은 ‘초습(初習)’이라고 할 만큼 칼을 수련함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단순한 동작인 주로 칼을 접었다가 공격하는 움직임이나 공격하였다가 겨누는 방식으로 지극히 단순한 자세로 구성되어 있다. 

 예도의 전체 문장구조는 해당 자세에 대한 모습을 설명하고(첫 자세 멈춤 동작), 이후 이 방법으로 어느 부분 혹은 어떤 공격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핵심적인 공격 기법에 대한 언급-두 번째 등장하는 ‘세’의 공격기법) 그리고 실제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첫 자세에서 다음 자세로 움직일 때 어떤 손과 발을 사용하고 어떻게(두 번째 자세) 움직여 어떤 보법으로 마지막 자세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법(看法)’이라 하여, 그 하는 법을 보라는 식으로 마무리하였다. 

 예를 들면 첫 자세에서 겨눔 변화 후 바로 공격하는 움직임이나, 상대의 공격을 1차로 막고 바로 공격하는 움직임이나, 1차 공격(상대방 방어) 후 바로 2차 겨눔이나 공격의 움직임 등이다. 따라서 예도24세의 기본 움직임은 엄밀히 보자면 두 동작으로 완성된다. 기본적인 낱개의 공방기법이 ‘예도 24세(증 4세)’가 되고, 이 움직임을 활용한 연속적인 투로 방식의 움직임이 소위 ‘예도총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조선적인 모습의 조선검의 모습은 ‘예도’와 ‘예도총보’에 담겨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외국에서 봤을 때 가장 위력적인 조선검법이 ‘예도’였으며, 조선 군사들이 계속 수련했던 조선검법이 ‘예도총보’였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혼란스럽기까지 한 내용이기도 하다.
  
- 한글본 언해본의 해석은 어찌할까?

  『무예도보통지』는 한문으로 4권 4책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한문서적의 경우는 끊어 읽기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잘못 끊어 읽어다가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번역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한문은 단순한 끊어 읽기의 문제로 인해 일본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한자로 해석해서 ‘~田’이나 ‘~村’이 ‘어디 밭’이나 ‘어느 마을’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정조임금님께서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한글본인 ‘언해본’을 함께 편찬을 명한 것이다. 한문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 군사들도 언해는 쉽게 해석하고 풀어 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한 ‘언해’가 18C 후반의 한글이라 당시의 군사들에게는 그냥 쉽게 읽혔겠지만, 현재 사용하는 한글과는 또 다른 형태라서 또 한 번의 언해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18C 한글을 현재의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이것도 상당히 복잡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가장 잘 알려진 검법인 본국검과 예도에 동시에 등장하는 한자 중 ‘찬(鑽)’에 대한 번역의 부분이다. 본국검에는 ‘찬자(鑽刺)’가 있고, 예도에는 ‘찬격(鑽擊)’이 있다. 언해본에는 ‘비븨여’라고 표기된다. 비빈다, 비벼서 찌른다, 비벼서 친다... 번역을 넘어서 이것을 몸의 동작으로 복원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무엇을 비빌 것이며, 어떻게 비빌 것이며, 왜 비벼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계속적인 혼란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당시인 1790년 무렵의 사전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요즘도 단어의 의미를 확인하려면 한글사전이나 영어사전을 찾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재물보(才物譜)』라는 책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만영(李晩永)이 1798년(정조 22)에 엮은 유서류(類書類) 책이다. 『재물보(才物譜)』를 보면, ‘찬(鑽)-천광(穿光)’이라 하였고, 그 뒤에 ‘찬궁(鑽弓)’의 설명에 ‘비븨 활’이라고 하였다.(『才物譜』卷6, 「物譜一」 財貨.) 

 ‘찬궁(鑽弓)’은 ‘비비활’ 혹은 ‘활비비’라고도 하는데, 활의 시위부분에 송곳의 줏대에 감고, 한 손은 줏대의 위를 나무나 돌 등 딱딱하고 되도록 마찰이 적은 재료로 누르개를 만들어 씌워 쥐고, 다른 손으론 바이올린이나 톱을 켜듯이 활을 밀고 당길 때 사용하는 도구다. 활 시위에 감아 당기기에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줏대를 회전시키는 운동으로 바뀌어 송곳날이 비벼지고, 이로써 구멍을 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송곳날을 제거하고 나무를 바로 마찰시키면 불 피우는 데 사용하는 ‘비비활’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찬격’ 설명인 언해본의 ‘비븨여 티ᄂᆞ’는 ‘칼날을 송곳처럼 돌려 치는 것’에 해당한다. 예도에서 사용한 칼이 기본적으로 양날 검방식이기에 이러한 설명이 더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양날 검 중 왼쪽 칼날을 사용 후 다시 왼쪽 칼날을 사용하라고 할 경우에 이러한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칼을 쥔 손이 송곳을 돌리 듯 움직인다. 쉽게 이야기하면 칼날을 뒤집듯 반시계방향으로 돌리는 움직임이다. 만약 상대의 칼에 막혔을 경우에는 칼끝을 반시계방향으로 감아 돌리듯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어서 함께 살펴봐야 할 책이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와 조선후기 사역원에서 신이행 등이 만든 중국어 어휘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다. 여기에도 ‘비븨’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순조대(1820년대) 유희(柳僖)가 여러 가지의 물명을 모아 한글 또는 한문으로 풀이하여 만든 일종의 어휘사전인 『물명고(物名攷)』에는 ‘부비’라는 연장이 등장한다. 이들 설명에서 ‘찬(鑽)’이라는 한문이 반드시 등장한다. 지금도 건축이나 가구제작 등 나무를 다루는 곳에서는 ‘비븨’나 ‘부비’가 ‘비비송곳’이라는 이름으로 두 손바닥 사이에 송곳자루를 끼우고 돌려서(비벼서) 구멍을 뚫는 도구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찬(鑽)’이라는 글자 하나를 가지고도 이렇게 복잡한 설명을 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단어나 한자가 『무예도보통지』에 넘쳐난다. 그래서 올바른 무예 복원의 길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다. 보이는 것은 단순하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의 본질적 의미를 알아내야만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세상사도 그러하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