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후 2시 팔달문 안 한 카페 2층에 있는 가빈갤러리(팔달구 정조로792)에서 작은 강의가 열렸다. 강사는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이었고 주제는 ‘일제 강점기 김세환과 수원지역 사회운동’이었다. 이 자리에는 수원의 역사와 문화 관련 세미나나 학술발표회 등에 항상 얼굴을 비치는 (사)화성연구회 최호운 이사장과 회원들, 김세환 선생의 후손들도 참석해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한 관장의 강의를 끝까지 경청했다.

한 관장은 독립운동에, 교육에 일생을 바친 김세환 선생의 자취를 세세하게 밝혀내 청중과 특히 후손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후손들조차도 잘 몰랐던 선생의 일생과 상세한 계보, 위대한 업적을 밝혀낸 한관장의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김세환 선생은 3.1운동을 사전에 기획·실행한 핵심인사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사람이자, 수원지역에서 선도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고 후세 교육에 앞장선 선구자다. 한성외국어학교와 일본 중앙대학에서 공부한 뒤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상업강습소(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와 삼일여학교(지금의 매향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줬다.

특히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였던 박희도 선생으로부터 3·1운동 동지 규합 요청을 받고 경기도 수원을 중심으로 충청지역까지 내려가 모집을 담당했다. 이와 관련, 한동민 관장은 2019년 2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관순 열사로 대표되는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도 김 선생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수원인근·충청지역의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 수원군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경성에서 진행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고 심한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독립을 위한 사회·문화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28년 신간회 수원지회장으로 선출됐으며 수원체육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선생은 광복을 맞은 지 한달 후인 1945년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고문당해 쇠약해짐 몸에다가 해방의 기쁨이 너무 과했던 나머지 몸을 상했다고 한다. 1963년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선생은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92)에서 출생하고 생활했다. 현재 (사)화성연구회 조성진 이사가 운영하는 가빈갤러리가 있는 곳이다. 조성진 이사는 한동민 관장으로부터 “이곳이 김세환 선생의 집터”라는 말을 듣고 현양사업을 시작했다.

사비를 들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회와 역사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빈갤러리 앞 인도엔 ‘김세환 집터’라는 안내판도 설치돼 있다. 조성진이사의 뜻과 행동이 아름답다. 조 이사에게 성원을 보내며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업적 알리기를 위한 관계기관의 다각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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