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취학연령을 한 살 낮추는 학제 개편 논란으로 전 부총리겸 교육부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물러났다. “제가 받은 교육의 혜택을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지만 많이 부족했다” “논란의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제 불찰이다” “우리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기원한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이것으로 그 진정성을 보여주었지만 부총리 혹은 장관이라는 직책은 진정성만으로는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왈가왈부가 필요없게 되었고 후임자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사퇴한 장관의 부산하던 기자회견장을 떠올리며 그런 고위직은 부처 직원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걸까,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단 며칠 만에 물러난 이번 경우에는 특별히 기억할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 같고 피차 어이없어 했을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럼 보편적인 경우는 어떨까? 교육 전반에 걸친 풍부한 학식으로 멋진 행정을 펼쳐보려는 장관도 있을 것 같고, 그보다는 정치적·행정적 역량, 열정, 결단력 같은 것으로 많은 일들을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장관으로 있을 때는 특별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물러나서는 “교육은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좋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온갖 이론과 주장으로 큰소리를 치는 경우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때 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그 자리를 지키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는 걸 본인도 모르게 고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물러난 사람은 말이 없어야 보기 좋지만 사람이 그렇게만 살 수도 없으니 고위직의 처신이란 이래저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직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학식이 풍부하다고 일도 잘하는 건 아니다’ ‘이번엔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할까?’ ‘내가 맡은 일은 어떻게 될까?’… 온갖 예상과 기대, 우려를 갖지 않을까 싶다. 실·국장들은 평직원들과 다를까? 장관은 그 간부들 생각부터 바꾸어 놓아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아서 혹 마음먹었던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건 이래서 실현하기 어렵고 이건 저래서 실현하기 어렵다”고 사사건건 반대 논리를 늘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간부들이 똘똘 뭉쳐서 새로 부임한 장관을 닦달함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치를 봐가며 자리를 지키는 꼴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해서 장관이 아무리 잘난 체 해봤자 우리가 한두 달이면 길을 들여놓는다면서 간부들이 희희낙락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가정들은 쓸데없는 잡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당위성이 굳건하게 정립되어 있는 일, 다수의 국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일, 실현을 위한 여론이 잘 형성되어 있는 일이라면 누가 그 일의 추진을 반대하거나 훼방을 놓거나 그르치게 하겠는가? 장관과 직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과정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 마침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적어도 손가락질 당하진 않는 공직자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념할 일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교육은 특히 그렇다. 사람들의 성격의 개별성, 의견과 행동양식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관되게 강조한 존 스튜어트 밀은 교육의 다양성 또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면서 “국가가 나서서 교육을 일괄 통제하는 것은 사람들을 똑같은 하나의 틀에 맞추어 길러내려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했다.

심지어 국가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효과적·성공적으로 그 틀 속에 집어넣을수록 그 주체가 왕이든 성직자든 귀족이든 다수파든 간에 최고 권력자들의 기쁨도 커진다고 비아냥거렸다. 국가가 운영하고 통제하는 교육이 꼭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시범적으로, 다른 교육 방식이 일정 수준에 오르도록 자극을 줄 목적에서 여러 경쟁적인 교육 체계 중 한 가지로 시도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기야 지금도 이미 만 5세(혹은 7세) 취학의 문이 열려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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