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82)] 일제강점기 수원 장시(場市)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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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82)] 일제강점기 수원 장시(場市)의 변화
  • 김충영 논설위원
  • 승인 2022.08.0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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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1930년대 수원역앞의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1930년대 수원역앞의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신읍조성 초기 활성화 방안으로 형성된 장시는 십자로 주변의 시전과 ‘북문밖장’ · ‘남문밖장’이 형성됐다. 북문밖장은 19세기 중반에 소멸돼 성내 시전에 통합됐다. 1894년 제작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인 ‘기전영지’(畿甸營誌)에 남문외장이 남암문 밖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안 장은 1904년 새로 신설됐다. 매달 9일, 19일, 29일에 섰고, 성 밖 장은 4일, 14일, 24일이었다. 5일장이 된 셈이다.

수원 주변은 평야지로 형성돼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과 남양만에서 생산되는 어염(魚鹽, 물고기와 소금)이 모여 거래되면서 염상(鹽商, 소금가게)과 미상(米商, 쌀가게), 우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수원은 일제강점기에도 쌀과 소금의 교역중심이 됐다. 

1912년에 작성된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朝鮮鐵道沿線市場一斑) 조선철도국 편에 의하면 성내시장은 1911년 10월 장날 하루 평균거래액은 2만원(圓), 성밖시장은 2만200원으로 이는 조선 3대 시장으로 일컫는 안성장의 1만5000원보다 많았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9월에 시장 규칙을 제정했다. 성밖시장은 1919년 1월 정식 시장으로 등록됐다.

1917년 수원전도. (자료=수원박물관)
1917년 수원전도. (자료=수원박물관)

수원 장시의 성장은 경부철도의 개통과 여주까지 도로 확장, 수여선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 짐에 따라 물품의 집산이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원보다 규모가 컸던 용인의 김량장과 안성장은 위축되는 계기가 됐다. 수원 인근의 오산장, 발안장, 반월장, 남양장은 수원장에 예속됐다. 

이후 수원의 성안장과 성밖장이 통합됐는데 두 시장은 모두 우시장을 겸했기에 성안장은 우시장으로 , 성밖장은 일반시장으로 통합됐다. 이로 인해 수원의 시장은 더욱 발전했다. 이후 수원장은 도·소매기능을 함께 담당하는 시장으로 발전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의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했다. 지적도를 만들고 지번을 부여해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을 만들어 임야와 전답을 관리했다. 이때 국토의 40%를 조선총독부 명의로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토지는 일본인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함으로써 일본인의 한국 진출을 촉진했다.

1920년대 종로에서 팔달문 상가 점포 현황도. (자료=수원박물관)
1920년대 종로에서 팔달문 상가 점포 현황도. (자료=수원박물관)

1920년대부터 수원에 진출하는 일본인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1929년 팔달문 옹성을 철거하면서 일본인들은 팔달문에서 수원극장 앞까지 대로변에 70~80개의 점포를 개설했다. 이처럼 수원상권은 경부철도가 생기면서 많은 부분이 수원역 쪽으로 연결되면서 역전거리 상권은 주로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됐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4일자 기사에 "정차장 근처부터 일인이 잠식 대오를 요할 우리’ 란 기사가 실렸다. ‘상계(商界)에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상권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근년에 와서는 차츰차츰 일본 사람에게로 옮아가는 영적(影蹟,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으니 수원시내만 볼 지라도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역에서부터 남문 외까지 날로 번성하여 가는 것과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사는 종로 일대가 날로 쓸쓸해 가는 것으로만 보아도 많이 그렇다고 부인치는 못하겠다"고 실렸다.

1940년대 일본인 기계수리점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1940년대 일본인 기계수리점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특히 일본정부는 식민통치 기간 여러 가지 이권사업을 규제했다. 반면 이주 일본인들에게는 건축토목업 · 양잠업 · 제지업 · 정미업 등을 권장함에 따라 이들 종목은 일본인에게 집중됐다. 또한 일본인들은 근대적 회사를 설립해 수원의 상권을 장악했다. 1920년대 수원의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운영한 종목은 조선 상인들이 시전의 품목이 아닌 향후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기간산업이었다.

당시 수원에 진출한 일본 상인은 64명으로 토목 건축업을 비롯해 양잠업, 제지업, 정미업, 숙박업, 고급음식점, 자동차관련 화물운송업, 양복, 목재상, 잡화 등의 종목을 일본인들이 선점했다. 반면 조선인의 상업 활동으로는 수원곡물협회를 비롯해 9개의 곡물도매상회와 다섯 개의 해륙물산객주업, 포목도매상, 잡화상, 자동차 관련 상회를 운영하는 정도였다. 

1930년대 대로변 잡화점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1930년대 대로변 잡화점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이처럼 조선인의 상권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 동아일보 1927년 1월 16일자는 '조선인 상인의 보수성과 개인주의 그리고 교통 등 주변 환경’이라는 기사에서 "이에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너무도 수원 상인은 수고적(守古的)이며 진보도 변통성(變通性)이 없는 것이 큰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너무도 개인주의에 치우치며 단결력은 아주 박약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다 대소 상점을 물론하고 사입지(仕入地, 상거래를 목적으로 물건 따위를 사들이는 장소)가 거의 경성인인데다가 매주(買主, 물건을 사는 사람) 들은 생각에 도리어 경성보다 많이 비싸겠거니 하는 데서 일이십원(一二十圓) 어치만 바꾸려 해도 경성으로 가는 까닭에 더욱 말이 못되어 갔다. 이것이 경성이 너무 가깝고 따라서 교통이 지나치게 편리한 연고(緣故)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팔달문에서 장안문 구간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팔달문에서 장안문 구간 모습. (사진=수원박물관)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수원 상계(商界)는 점포수 505개로 증가했고, 따라서 상인을 중심으로 실업회를 조직해 활동함으로써 수원은 유수한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 1942년에 발간된 ‘수원상공인인명록’에는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에 개설된 수원읍 상점은 93개 업종 총 866개 업체가 등재됐다.
 
이중 음식점이 82개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잡화점 57개소, 식품점 49개소, 미곡점 43개소, 가구점 35개소, 약종상 34개소, 양복점 31개소, 청과점 28개소, 여관 26개소, 연초판매소 26개소, 면견포 21개소, 자동차 21개소 순이었다.

이들 업종중 제조업은 인쇄, 주물, 직물, 제화, 양조, 제철 등 10여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가공 또는 판매업에 해당했다. 민족별로는 한국인이 74개 업종에 696개소, 일본인이 67개 업종에 121개소, 중국인이 2개 업종에 11개소를 운영하고 38개소의 법인이 등록됐다. 

일본인들은 수익이 낮거나 사회적으로 꺼려지는 업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업종에 진출했다. 특히 법인체의 대다수가 일본인들이 설립한 업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권업종에 해당하는 금융업, 자동차업, 종묘업, 농기구, 철도, 운송업, 토목업, 포목업 등 20개 업종을 일본인들이 독점함으로써 수원지역 또한 일제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했다.

 ※ 다음 83회(8일자) '김충영 수원현미경'은 필자 여름휴가로 쉽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