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수원순교성지와 북수동성당 정문, 종탑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천주교 수원순교성지와 북수동성당 정문, 종탑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을 시작으로 총 9차례, 1만여 명이 순교했다. 수원지역의 박해는 8번째 발생한 병인박해 때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당시 수원화성에서는 83명이 순교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 중에서 수원 출신 순교자는 18명이었다. 

병인박해 이후 수원지역은 정조의 효심으로 축성된 고을이라는 지역특성으로 충·효·열(忠孝㤠) 사상이 높은 곳이어서 천주교의 전파가 활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몇 곳의 교우촌은 유지됐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묵인된 것은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수호통상조약)이 조선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뒤부터였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음에도 프랑스 신부들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 따라 수원 왕림의 갓등이 공소(公所,사제가 상주하지 않고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 없는 곳)가 한수(漢水)이남 경기도 공소 중에서 가장 먼저 1888년 7월 본당으로 승격됐다. 

오늘날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갓등이왕림성당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유서 깊은 천주교 교우촌이였다. 갓등이 성당이 본당으로 승격하게 됨에 따라 수원읍내 천주교가 다시 활기를 띠는 계기가 됐다. 

당시 수원읍내 교우 유지들이 2대 주임신부인 알렉스 요셉 신부와 협의해 수원읍 남부면 남수리 황학정 부근의 밭 800평과 25칸짜리 한옥을 매입, 화양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천주당(天主堂)이란 간판을 달고 일부를 공소 강당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1890년 갓등이 본당에 속한 수원읍 공소가 본격 태동하게 됐다.

알렉스 신부가 수원읍내에 또 다른 건물을 물색해 매입한 건물이 바로 북수리 소재 팔부자(八富者)집 두 채와 거기에 달린 행랑채, 대지 약 300평이었다. 이곳이 오늘날 북수동 성당이 위치한 곳이다. 그러나 수원읍내에는 천주교의 전교가 타 지역에 비해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끌어온 천주교 박해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무속과 도교, 점집들이 난무했다. 심지어는 동학이 성행하면서 천주교인들을 위협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박해시대가 끝났음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계속되는 목숨의 위협을 안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알렉스 신부가 수원읍에 땅과 집을 사서 공소로 만들려고 하자 수원군수는 이 문제로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본인은 서양인이 수원에 집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사람이 우리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엄격히 반대하는 바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박해시대가 끝난 지 무려 20년이 지난 1906년에 순교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이가환(李家煥)의 후손이 찾아와  순교로 인해 가문에 돌아온 오명(汚名)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알렉스 신부에게 오명을 벗고 일반인처럼 벼슬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볼 때 천주교에 대해 거부감이 더욱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수원지역에 1910년대를 전후해 천주교는 더욱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 왕림 본당 알렉스 신부는 신자들과 갈등이 생기자 왕림성당에서 수원읍내 공소로 거처를 옮겨 사목활동을 했다. 

당시 왕림성당 예하에 공소가 27개소가 있었다. 전체 신자는 1311명으로 공소당 평균 신자수는 49명이었는데 수원읍내 신자는 59명으로 공소 평균 49명에서 10명이 많은 숫자였다. 공소 중 신자가 많았던 곳은 양간공소(화성시 양감면 용소리)110명, 독정이(화성시 장안면 독정리)가 173명으로 수원읍 신자보다 월등히 많았다. 

이러한 여건에서 알렉스 신부와 후임 르각 신부는 계속해서 수원읍에 머물렀으나 후임 김원영 신부는 거처를 왕림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김원영 신부는 1921년 5월 1일 서울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브레 주교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올린다. 

1922년 5월 1일 김 신부가 드브레 주교에게 보낸 편지.
‘최근 수원읍의 교우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읽어보니 본당신부를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주교님께도 한 통의 편지를 보내고 수원읍에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편지를 기꺼이 주교님께 보내드립니다. 교우들의 전신도 수원읍을 위해 신부 한 분을 청하려는 제 뜻과 같았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의 순교자들로 유명한 그 읍내에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도록 서양 신부 한분을 보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위 편지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당시 교우수가 부족하여 수원읍내의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이 어려웠다. 그러나 김원영 신부와 공소 신자들의 강력한 요청과 순교의 거룩한 땅임을 강조했다. 1923년 11월 23일 드디어 수원본당 설립이 승인됐다. 이는 그 자체가 성지로서의 시작이었다.

수원본당은 초대 르메르(루도비코)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눈부신 교세 확장을 하게 된다. 1925년에는 읍내 신자 수가 300명으로 증가했다. 공소 신자들까지 합치면 전체 신자 수는 1500명에 달했다. 수원본당에 편입된 공소는 호매실리, 안룡면, 오목천, 대황교리, 병점 등이었다.

그 뒤 2대 주임으로 크렘프(헨리코)신부, 3대로 박일규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4대로 뽈리(데시데라도) 신부에 의해서 본격적인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 때 소화강습회(소화초등학교 전신)설립과 1932년 고딕성당을 신축하게 되는 등 교회발전을 이뤘다. 당시 수원읍내에 만연한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가톨릭신앙을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 

심응영 뽈리 데시데라도 신부상. 수원순교성지내에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심응영 뽈리 데시데라도 신부상. 수원순교성지내에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박해시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모범을 따르는데 주력했다. 뽈리 신부는 기존 신자들의 친지나 이웃의 전교에 힘썼다. 그는 8.15 해방이후 주일 강론에서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악한 목자는 자기 생명이 위태로워지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하였는데, 6.25때 자신이 사목하던 천안 본당을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순교함으로써 스스로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정신은 함께 수원성당 초대 보좌 신부로 부임한 김경인 루도비코 신부에게서도 일어났다. 김 신부는 1946년 황해도 안악본당 신부로 재임하다가 6.25때 피랍돼 해주형무소에서 수감 중 옥사했다. 수원본당 신자들은 뽈리 신부 등 순교자들의 순교비 건립을 위해 모금을 해 경향잡지에 기탁하기도 했다. 당시 어려운 정치·사회적 사정으로 순교자 현양사업은 잊히고 말았다.

1963년 10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윤공희 빅토리아노 주교를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함에 따라 수원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독립했다. 당시 수원교구 관할구역의 인구수는 133만6742명이었다. 신자수는 4253명(인구대비 0.32%), 사제 36명, 수녀 39명, 신학생 78명, 본당 52개소, 공소 254개소이었다.

윤공희 주교는 1965년 9월 26일 수원교구 최초로 순교자 현양대회를 미리내 성지에서 거행했다. 2대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는 1990년 12월 8일 남양순교성지를 ‘성모순례성지’로 지정했다. 3대 수원교구장인 최덕기 바오로 주교는 교구설정 30주년 기념 순교자현양대회 및 100년계획대성당 기공식을 천진암 성지에서 개최했다. 

수원순교자 현양비. 수원화성에서 순교한 이들을 현양하기 위해 수원순교성지내에 세운 비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순교자 현양비. 수원화성에서 순교한 이들을 현양하기 위해 수원순교성지내에 세운 비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1997년 6월 4일 3대 수원교구장에 취임한 최덕기 바로로 주교는 2000년 9월 20일 북수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수원화성을 ‘수원순교성지’로 선포했다. 그 후 매년 수원지구 차원의 ‘순교자현양대회’를 열고 있다. 

2005년 9월 22일 수원순교성지와 수원교회사연구소는 수원순교성지와 수원지역 신앙선조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수원지역의 순교역사를 발굴하고 성지발전방향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갖기도 했다. 수원순교성지는 김학렬 신부, 김동욱 신부, 나경환신부 등의 노력으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 수원순교성지는 순교자 20위 원프란치스코, 윤자호 바오로, 지 다태오, 박의서 사바스,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김사범, 김양범 빈첸시오, 황요한, 서여심, 심원경, 권중심, 윤평심, 홍창룡, 박선진 마르코, 박태진 마티아, 고야고보, 심응경 뽈리 데시데라도, 유영근 요한, 요한 콜랭 등 20위의 시복시성(諡福諡聖)운동, 천주교에서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을 교황의 공식 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수원순교성지 북수동성당 모습. 1932년에 건립됐던 고딕양식의 성당이 한국전쟁으로 훼손됨에 따라 1979년에  ‘주교관’ 모습의 성당으로 새로이 건립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순교성지 북수동성당 모습. 1932년에 건립됐던 고딕양식의 성당이 한국전쟁으로 훼손됨에 따라 1979년에  ‘주교관’ 모습의 성당으로 새로이 건립됐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본당(현 북수동성당)은 1923년 11월 23일 본당 설립이 승인돼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150여 년 전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신앙선조들이 시복시성으로  복자(福者) 품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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