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 당상관의 관복에 수놓은 쌍호흉배(雙虎胸背)의 모습이다. 정조가 생각했던 무비(武備)의 본질도 항심을 지키는 것이었다. 쉼없는 수련과 훈련 속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무관 당상관의 관복에 수놓은 쌍호흉배(雙虎胸背)의 모습이다. 정조가 생각했던 무비(武備)의 본질도 항심을 지키는 것이었다. 쉼없는 수련과 훈련 속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누구나 처해진 상황은 다르다. 그리고 그 상황 또한 늘 변화한다.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그 변화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탈이 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살피고 항심(恒心)을 만드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겠지만, 다시 햇살이 비추면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해야 하는 곳이 군대다. 만약 적군의 전술이 바뀌었는데, 그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 없다.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조선군은 개국 초기부터 북방의 여진족을 주적으로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기병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술편제를 구축했다. 세종시절 4군 6진을 개척하고, 영토 확장을 꿈꿀 때도 역시 기병중심의 오위진법(五衛陣法)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심지어 을묘왜변(乙卯倭變)을 비롯한 삼포의 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도 조선군은 기병을 주력으로 이들을 방어했다. 어찌됐든 배를 타고 들어온 왜구들이 육지로 상륙했을 때, 기병들이 빠르게 추격하여 소수병력으로 각개 격파하는 방법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달랐다. 그 규모와 시간 모두 이전의 작은 전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조선 땅 전체가 전란에 휩싸일 정도로 넓은 영역에서 십만 이상의 왜군들이 부산포를 기점으로 퍼져 나갔다.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 전투를 이끈 신립(申砬) 장군의 경우도 기병전술에 모든 것을 쏟았기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임란 당시 일본은 원사무기로는 개인화기인 조총을 활용하였고, 근접무기로는 왜검과 장창을 전면에 내세우며 조선군의 기병전술을 깨뜨리는 새로운 전법(戰法)을 시도했다. 그 결과 상륙후 불과 20일이 안 돼 도성이 함락되고, 경복궁은 불타올랐다. 그리고 국왕인 선조는 평양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우리가 학창시절 한국사 시간에 배웠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는 새로운 부대도 그 전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 부대에서 운용했던 새로운 전술이 삼수병(三手兵) 체제, 즉 포수(砲手:조총병)·사수(射手:궁병)·살수(殺手:창검병)를 함께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지방군도 속오군(束伍軍)이라는 이름으로 삼수병체제로 전환시켜 전술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변경했던 보병중심의 전술변화는 병자호란을 거치면 또 다시 흐트러지게 되었다. 청나라는 근접 보병보다는 빠른 속도전을 중심으로 한 기병전술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청나라 선봉 기병의 빠른 남하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화도로 피신을 떠나려고 했는데, 이미 적 기병이 현재의 서울 불광동 지역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강화도의 반대반향인 남한산성으로 도망치듯 떠난 것이다.

조선군은 다시 기병전술을 보완해야만 했다. 그래서 정조대에 편찬된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창과 마상편곤을 비롯한 마상무예 여섯 가지가 추가된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준비하며 스스로 변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무예 수련도 그러하다. 언제든지 상대와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그 신체적 안정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쉼 없는 수련을 더해 마음의 평온함까지 찾아 가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의 내용 중 이덕무(李德懋)가 국왕인 정조에게 쓴 글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무릇 사자가 공을 희롱하며 이리저리 뛰고 자빠지고 엎어지기를 하루 종일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끼리를 잡을 때나 토끼를 잡을 때도 모두 전력을 다하는 것은 공놀이와 같은 끊임없는 추진력 때문입니다. 왜인(倭人)들은 한가할 때 방 앞에 짚으로 만든 베개 같은 것을 놓고 목도(木刀)를 잡고 틈날 때마다 쳐서 그 세법과 기법을 수련하니 어찌 신묘한 칼 쓰는 솜씨를 얻지 못하겠습니까?”

맹수인 사자가 하루 종일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노는 것은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 놀이를 통해 호흡을 가다듬고 근육과 관절을 강화시켜 실제 사냥에서 전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예수련은 놀이로 발전하기도 하고, 놀이가 현대화된 스포츠로 안착되기도 한다. 반대로 겨루는 놀이가 발전하여 맨손무예인 권법으로 체계화되는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모두 항심을 가지고 즐기며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왜인들은 한가할 때 목검을 가지고 짚 베개를 치면서 섬세한 검술훈련을 한다고 주지시켰다. 임진왜란시 일본군의 날카로운 검술은 그렇게 완성된 것이다. 당시 조선군은 칼집에서 칼조차도 뽑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륙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사료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것이 율곡 이이가 이야기 했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과 같은 거대한 담론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현장에서 끊임없이 내려베기 한번, 발차기 한번에 혼신의 정성을 담아 제 몸 속에서부터 풀어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대의 군이라면 작은 소총으로 발사하는 작은 탄환 하나부터 전차의 포신을 통해 발사하는 육중한 포탄 한발이라도 온 신경을 집중하여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작은 마음들이 모여 ‘무비(武備)’가 안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져 묻듯이 논쟁하는 경우도 많다. 쉽게 말해, 수련이나 훈련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먼저 제공해야 좋은 결과물이 있다는 논리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찌 모든 환경이 최선의 상황일수가 있겠는가. 더디더라도 그 주어진 환경을 조금씩 개선해 가면서 최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맹자(孟子)』에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등(滕)나라 문공이 (맹자에게) 물어 말하길, "제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설(薛) 땅에 성곽을 쌓으려고 합니다. 나는 무척 두려운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滕文公問曰(등문공문왈), “齊人將築薛(제인장축설), 吾甚恐(오심공), 如之何則可(여지하즉가>”"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설(薛)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은 곳이었는데 제나라가 강제로 점령한 후, 그 옆에 위치한 등(滕)나라 방향으로 성을 쌓는다고 하니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적국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자기 나라를 향해 새롭게 성을 쌓는다고 하니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에는 맹자가 옛 이야기를 꺼내며 관련한 조언을 펼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매듭짓는다. “彊爲善而已矣(강위선이이의)-온 힘을 다해 선을 행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쉽게 말해, 죽어라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펼쳐진 상황이고,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면 답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 안에서 진심전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 다음의 결과물은 오직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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