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에 휩쓸리지 않은 시인

시인이 참 많다. 내 젊은 시절 이 나라 국민 모두가 시인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모국어를 잘 다룰 줄 알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기본으로 우주와 한 몸이 되는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모든 국민들이 시인이라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일 것인가?

그러나 스무 살 무렵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을 하고 ‘시인’이 된 내가 만난 이 땅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는 문단정치에 골몰하고 비평이 아닌 비난을 일삼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문학인으로서의 기본은 갖춰져 있었다. 1970년대 당시 등단제도가 나름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의 신춘문예와 몇 안 되는 문예지의 신인상, 또는 추천제도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참 까다로워 1년에 등단하는 시인은 많아야 전국에서 20명 정도였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문예지가 우후죽순 식으로 발간되고 그 지면을 통해 신인들 역시 장마철 버섯처럼 배출됐다. 어느 문예지는 한꺼번에 20명 정도나 되는 신인을 ‘등단’시키는 것을 보고 혀를 찬 적도 있다. 뭐, 이유야 뻔하다. 그들이 책을 사주고 앞으로 정기 구독자가 될 터이니까. 발행인이나 심사위원의 든든한 ‘한 표’가 될 터이니까.

이런 와중에도 좋은 시인들은 배출되고 있다. 시인이라고 요란 떨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 천착(穿鑿)하고 있다.

오늘도 빈 마음으로 운행 시작하는 이종구 시인

이종구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라이더’다. 오토바이를 타고 분초를 다투며 음식물이나 물건을 배달해주는 택배기사.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전엔 택시운전수도 했다.

이종구 시인. (사진=김우영 필자)
이종구 시인. (사진=김우영 필자)

시동을 켜면 나는,/허파나 심장에 깃들었던 내 생각을 지우고 빈 차가 됩니다//애초에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서니/당신이 가는 곳이 곧 나의 목적지가 될 터인데/지금 내 마음은 비어있으니 빈 차가 되었지요//당신이 이생에서 가고자 하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컴컴했던 마음에 불 밝히고/마음이 비었음을 빈 차로 보일러니 /걸음이 성가시거나 바쁜 날엔 내게로 오시지요//기쁨을 찾아가는 길이라면/설레는 마음으로, 직진하고/슬픔을 억누르며 가는 길은/좌회전으로 돌아서 다시 좌회전,/한 바퀴 돌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하릴없이 술에 취한 날에는/당신의 공허함이 채워질/친구가 있는 곳이 목적지가 되겠지요//깜빡이는 항상/당신이 가야 할 목적지로만 깜빡거립니다//전쟁 같은 당신의 출근 시간과 등교 시간을 맞추느라 발을 동동거리고/비행기 시간과 열차 시간을 맞추려/매의 눈을 뜨고 감시하는,/과속과 신호위반, 카메라를 감수하며 달려가는 나는,/어쩜 나는, 당신 전생의 어미 아니면 아비였을 거예요/그 마음이 내 마음이니까요//그대가 내 생각에서 내리면/나는 다시, 깊은 마음에서 당신 생각을 내려놓은/빈 마음, 빈 차가 되어 당신을 기다리게 되겠지요//오늘도 나는 빈 마음으로 운행을 시작합니다.-「택시, 운행을 시작하면서」 전문

이종구가 첫 번째 시집 『태어난 새는 날아야 한다』를 낸다며 내게 글을 부탁해왔다.

그가 보내온 시들 중 무릎을 치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 시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것은 해설 없이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기교도 없는데 그의 생활과 따듯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족, 깨달음까지도 아우르는 시편들

내게 보낸 온 시들은 세월호 참사와 5.18민주화운동 등 민족과 역사를 아파하는 현실참여시로부터 가족을 향한 포근한 사랑, 불교적인 깨달음의 시편 등 매우 다양하다. 하긴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시 쓰기였으니 40년 동안 시적변용은 당연히 있었을 터이다.

그가 살아온 세월도 녹록치 않다. 그 스스로도 거쳐 온 직업이 다 헤아리기 어려울정도로 많다고 했다.

14살에 시작한 ‘타일데모도’, 양복점 시다, 문구점 점원, 대성탄좌 도계광업소 탄광노동자, 청룡사 수행, 광고기획사 운영, 음료회사 영업사원, 불교청년회 상근직원, 라면대리점 운영, 막걸리대리점 운영, 엘지필립스 건설노동자, 통닭집 운영, 택배기사, 대리기사, 택시운전기사, 수원농고 드론 지도강사 등.

이종구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일당 500원짜리 ‘타일데모도’로 건설현장에서 일 하면서도 공부가 하고 싶었다. 중학교 영어첫걸음과 중학수학책을 사서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를 했단다.

1978년부터는 서울대 학생들이 운영하는 서둔동 농대연습림 서둔야학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불온야학으로 낙인찍혀 폐교되는 바람에 공부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후 6개월 만에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고, 평생교육 과정을 통해 수원과학대에서 행정전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니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놀랍기만 하다.

이종구와의 만남은 1983년 무렵인 듯하다. 이종구는 포교당에 있는 수원불교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혼자 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신건재라는 선배가 나를 소개했다고 한다. 신건재는 나의 고등학교 한반 친구였는데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그 후 수원문화원 소속 등불동인회, 노작문학연구회, 시발(詩發)동인회 등 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워나갔다. 대원불교대학에서 정식으로 불교학 공부도 했다. 전기한 것처럼 그의 일부 시에서 향냄새가 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힘든 세월 살아 온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험한 세상을 살아온 그는 몇 해 전 큰 부상을 당해 목숨이 경각에 이르기도 했다. 옥상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는데 그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건물주 아주머니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단다. 그리고 종구를 발견했단다. 119 구급대가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아내는 영정사진까지 준비했단다.

그렇지만 치열한 삶으로 단련된 그의 정신은 육신의 깊은 상처를 이겨냈다. 지금은 택배나마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이 됐다.

“저 스스로 잘 쓰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시 쓰는 일을 평생 해왔음에도 생의 이력을 시속에 담아내지 못했지요”

얼마 전 배달일 도중 만난 이종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니다. 시인이여. 나는 자네의 삶과 시에 경의를 표한다. 잘 살아왔다. 좋은 시를 썼다.

그 생애를 잘, 알아보기 쉽게, 감동적으로, 시에 담아낸 자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세제 통에 담가 놓은 걸레들/꽉 짜보면 눈물 나지 않는 걸레가 없다//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바싹 마른걸레도/뼈마디 관절마다 파스 안 붙인 곳이 없다. -「걸레를 빨며」 전문

‘꽉 짜보면 눈물 나지 않는 걸레가 없다.’ ‘바싹 마른 걸레도 뼈마디 관절마다 파스 안 붙인 곳이 없다.’는 이종구 시인의 시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이 어서 세상에 나와 결코 편치 않은 세월을 살아 온 대다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