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중 춘당대 부분도 : 춘당대는 조선후기 국왕이 직접 군사무예를 훈련시고 지휘했던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자료=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중 춘당대 부분도 : 춘당대는 조선후기 국왕이 직접 군사무예를 훈련시고 지휘했던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자료=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춘당대(春塘臺).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임진년, 왜놈들에게 당한 고통은 궁궐이 잿더미가 되어 오래도록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동궐(東闕), 창경궁과 창덕궁의 시대가 열렸다. 그곳의 뒤뜰인 후원에는 춘당대가 있었다. 

춘당대는 「동궐도(東闕圖)」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큰 그림에서는 오른편 상단에 위치해 있다. 그곳을 보면, 네모난 연못 부용지(芙蓉池)가 있고, 그 건너편에 이층집 주합루(宙合樓)가 있다. 주합루 1층의 이름이 우리가 자주 듣던 ‘규장각(奎章閣)’이다. 

정조시대 학문적 기풍을 이끌었던 모든 이가 이곳에서 책을 봤다. 일종의 왕실 도서관 역할을 한 곳이니, 보고 싶은 귀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에 이덕무나 박제가가 책을 펼치며 공부를 했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발간된 책들도 이곳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작은 문 하나가 있다. 어수문(魚水門)이다. 어수(魚水:물고기와 물), 물을 만난 물고기의 심정이 떠오른다. 그렇다. 신하들은 물고기요, 국왕은 물을 상징한다. 세상 그 어떤 물고기도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국왕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물이 맑고 깨끗해야 물고기들이 잘 살 수 있다. 물이 더러워지면 물고기도 더러워지는 것이다.

연못의 남쪽에는 평면 구성이 열 ‘십(十)’자 모양을 하고 있는 부용정(芙蓉亭)이 있고, 동쪽에는 영화당(暎花堂)이 있다. (<그림>에서 원형표시 왼편이 규장각과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이다.) 그리고 연못 남쪽 모퉁이 장대석에는 물에서 튀어 오르는 잉어 조각이 있다. ‘등용문(登龍門)’, 잉어가 튀어 올라 용이 되었다는 전설... 입신출세의 꿈이 그곳에 소박하게 물고기로 남아 있다.

궁궐 대부분의 건물들은 겨울 햇살을 잘 받도록 남쪽을 향한다. 그런데 유독 영화당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정확하게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유가 있다. 영화당에서 바라보는 넓은 공간이 바로 ‘춘당대(春塘臺)’다. 보통은 영화당 앞의 조금은 작은 마당을 춘당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영화당에서 저 멀리 동편의 궁궐 담장까지 너른 공간이 모두 춘당대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곳에는 관덕정(觀德亭), 관풍각(觀豐閣)의 건물들과 백연지라는 연못, 그리고 논과 밭 등 다양한 시설들이 담겨있다. 관덕정은 활쏘기를 비롯한 다양한 무예 연마를 위한 곳이고, 관풍각은 궁궐 후원의 논과 밭을 비롯한 농업 진흥과 관련된 곳이다. 조선후기 국왕이 직접 농사일을 의례처럼 진행했던 친경례(親耕禮)가 바로 이곳에서 진행된 것이다.

춘당대의 동쪽 경계는 후원의 담장이다. 그곳을 넘어서 궁궐의 높은 담장에는 집춘문(集春門)이 있다. 그리고 그 문 밖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다. 조선후기 국왕들이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나 성균관 유생들을 불시 점검 할 때는 집춘문을 조용히 넘었다.

춘당대라는 이름처럼 돌을 쌓아 높인 곳이기에 그곳에서 멀리 동쪽 궁궐 담장까지 바라보며 군사들의 무예훈련을 바라본 것이다. 실제로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를 비롯한 여러 그림사료에서 영화당 아래 너른 공간에 무과시험장을 만들고 무예 시험을 준비하는 광경을 살펴 볼 수 있다. 춘당대에서 동편을 바라보며 저 멀리 연못을 지나 논과 밭 사이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추(騎芻) 표적과 거대한 솔포 과녁이 놓여 있는 광경이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의 <병기총서>에는 유독 ‘춘당대(春塘臺)’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 ‘영화당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았다.’ ‘영화당에 국왕이 납시어 금군의 화포 쏘는 시험을 하였다’라는 식의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인조 17년(1639)의 기록을 보면, 인조가 "이곳은 무예시험에 편한 장소이니 지금으로부터 이후에 봄에는 2월과 3월, 가을에는 8월과 9월에 활쏘기와 포 쏘는 시험을 항구히 하도록 법규로 정하라."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게 춘당대는 국가가 인정한 공식적인 무예시험 장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춘당대에서 치러지는 과거시험이라는 뜻으로 ‘춘당대시(春塘臺試)’라는 이름이 자리 잡히기도 했다. 정조는 춘당대에서 수련하는 군사들의 무예수련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하여 자주 이곳에 왔다. 심지어 이곳에서 군사의례인 ‘열병(閱兵)’ 의식을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진행하기도 했다. 군사들의 거친 숨소리를 몸으로 느끼며 국정 개혁의 의지를 다진 것이다. 그리고 춘당대에서 치러진 무과시험과 다양한 승진시험을 통해 정조의 친위군인 ‘장용영(壯勇營)’의 핵심 자원들이 선발된 것이다. 

또한 정조는 춘당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영화당에서는 초계문신의 친시(親試)와 과시(課試)를 치르며 함께 따르던 선전관(宣傳官)에게 꿩구이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 자리에 난로를 설치하고 연석에 나온 신하와 군사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과시험도 그곳에서 특별 과거시험의 일종인 별시(別試)의 형태로 진행되곤 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도 바로 이곳 춘당대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판소리 완판본 『춘향가』에 이몽룡이 춘당대에서 과거를 치르는 대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때 한양성 도령님은 주야로 시서백가어를 숙독하얏스니 글로는 이백이요, 글씨는 왕희지라. 국가에 경사잇서 태평과를 뵈이실새, 서책을 품에 품고 장중에 들어가 좌우를 둘러보니 억조창생 허다선배 일시에 숙배한다. 어악풍류 청애성에 앵무새가 춤을 춘다. 대제학 택출하야 어제를 내리시니 도승지 모셔내어 홍장 우에 걸어노니 글제에 하엿시되 ‘춘당춘색이 고금동이라’ 뚜렷이 걸엇거늘 이도령 글제를 살펴보니 익히 보던 배라. 시제를 펼쳐 노코 해설을 생각하야 용지연에 먹을 갈아 당황색 무심필을 반중등 덤벅풀어 왕희지필법으로 조맹부체를 받아 일필휘지 선장하니 상시관이 글을 보고 자자이 비점이요 구구이 관주로다. 용사비등하고 평사낙안이라. 금세의 대재로다. 금방에 일흠불러 어주삼배 권하신 후 장원급제 휘장이라. 신래진퇴나올적에 머리에는 어사화요 몸에는 앵삼이라. 허리에는 학대로다. 삼일유가 한 연후에 산소에 소분하고 전하에 숙배하니 전하께옵서 친히 불러 보신 후에, ‘경의 재조 조정에 으뜸이라.’ 하시고 도승지 입시하사 전라도어사를 제수하시니 평생의 소원이라. 수의 마패 유척을 내주시니 전하께 하직하고 본댁에 나어갈제 철관풍채는 심산맹호 같은지라. ..."

그렇게 이몽룡은 사랑을 찾아 남원으로 암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너른 들판을 품은 춘당대는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궁궐파괴 전략에 따라 그곳은 거의 소멸지경에 이르렀다. 그 주변은 창경궁에서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위상이 변해버렸다. 국왕이 거처하던 공간이 요상한 동물들로 가득 차 버렸다. 해방 이후 서울대공원으로 동물원은 이전해가고 몇 개의 전각들을 복원했지만, 춘당대 앞은 여전히 작은 마당만 간신히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너머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창덕궁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곳이 눈에 밟힌다. 이제라도 춘당대에 대한 의미와 공간회복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무예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보살펴 조선을 지켜냈던 공간, 그곳이 춘당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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