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중략)…/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金芝河)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일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모든 시위현장에서 성가처럼 불려졌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이 시는 1975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담아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에 대항한 시다.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와도 닮아 있어 한때 표절논란도 일었으나 민주화라는 대의 앞에서 이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모래 위에 눈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모든 백지 위에/돌과 피와 종이와 재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중략)...자유여’-폴 엘뤼아르 ‘자유’

이에 대해 평론가 황현산은 “엘뤼아르의 ‘자유’가 길고 반복적인 성찰로 자유를 내면화하는 데 비해 민주주의를 절규하는 목소리로 ‘호소’하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그 감동이 그만큼 더 직접적이기에 더 훌륭한 시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그것이 표절을 말하려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한 놈 나온다./국회의원 나온다./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가래 끓는 목소리로 웅숭거리며 나온다/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한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다. 부정부패로 부(富)를 축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비판한 풍자시이다.

당시 대부분의 민중들은 빈곤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오적’들을 비판한 이 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6년 어느 날 '사상계'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 수원경찰서 앞을 지나다가 봉변을 당했다. 매향동 헌책방에서 당시 50원인가 100원인가를 주고 구입한 헌책이었는데 거기에 ‘오적’이 실려 있었다.

횡재 한 기분이 들어 막걸리 한잔 하고 흥얼흥얼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나를 불러 세운 경찰은 사상계를 빼앗아 오적이 실린 페이지를 보더니 “이거이거 빨갱이 아냐?”라며 경찰서로 끌고 들어갔다.

뭔 잘못이 있느냐고 바득바득 대들었다가 몇 대 얻어터지기도 했다. 머리카락도 한줌 넘게 뽑혔다. 아씨. 지금도 생각난다. 그 사람.

신원조회를 마치고 내보내 줄 때도 “또 다시 이런 ‘불온서적’을 들고 다니면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단순히 사상계를 들고 다닌 나도 이런 봉변을 당했는데 그 시를 쓴 김지하 시인은 어땠을까.

김지하, 사상계의 편집진들까지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사상계도 강제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라고 불릴 만큼 그의 투쟁과 고난은 계속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그해 체포된 후 비상보통군법회의로부터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2015년 법원은 김 시인이 민청학련과 오적필화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원의 국가배상판결을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사회에서 김지하를 구명하기 위한 활동이 펼쳐졌다. 세계적 지식인인 사르트르, 보부아르, 노엄 촘스키 등이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했다. 이로인해 그는 약 10개월 만에 출옥한다.

그때 출옥 소감이 세간에 회자됐다.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 시인이구나.

그런데 그는 곧바로 다시 체포돼 감옥살이를 한다. 한 신문에 ‘고행―1974’란 글을 실었는데 그 내용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기왕의 무기징역에 더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됐다. 1980년 12월에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그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1981년에는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수상했다.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제10회 대산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등을 받았다.

그 김지하 시인이 지난 8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 민주화 투쟁 동료들에 대한 원색비난 등으로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변절자 취급을 받았지만 민주화에 대한 공로는 분명하다.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중심에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시인이 삶이 안타깝다. 명복을 빈다. 김지하.

아하! 나는 새벽에 그대의 노래를 다시 부르노니

타는 목마르...

민...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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