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 :1757년, 영조는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음주를 금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먹을 쌀도 없는데, 술을 빚는다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저 위에 도장찍힌 '조선총독부도서지인'이라는 붉은 도장이 더 짜증나게 보인다. 이 또한 식민지를 거친 슬픔이다.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 :1757년, 영조는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음주를 금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먹을 쌀도 없는데, 술을 빚는다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저 위에 도장찍힌 '조선총독부도서지인'이라는 붉은 도장이 더 짜증나게 보인다. 이 또한 식민지를 거친 슬픔이다.

술...
 요녀석으로 인해 참 말 많고 탈도 많지만, 시린 가슴팍에 한잔 끼얹으면 그나마 세상살이 시름이 잠시는 사라지고, 정겨운 옛 친구를 만나 잔을 부딪치면 넉넉한 마음이 두 배가 되게 해주는 고마운 녀석이기도 하다.

그런 고마운 술을 절대 만들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금주령(禁酒令)이 국왕의 입을 통해 추상처럼 펼쳐져 조선시대 내내 함께 했으니 요즘 아침마다 코끝 빨개지는 주당들이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그런 때였다. 가뭄과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발생하니 주린 배를 채우지도 못할 귀한 곡식을 술을 빚는데 사용한다는 말은 천인공노할 일이기까지 했다. 보통은 그런 가뭄이나 흉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금주령은 해제되었고, 백성들은 각각 집집마다 술을 빚어 집안 제사에 사용하거나 대규모로 술을 빚는 술도가 근처 주막에는 대낮부터 취한 사람들이 넘쳐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대에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선왕인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려 즉위초반부터 정치적으로 삐걱거리더니 재위 4년인 1728년에는 이인좌의 무리가 전국으로 난을 일으킨 무신난(戊申亂)까지 더해 성군을 꿈꿨던 영조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혔다. 거기에 생모인 숙빈 최씨의 경우는 신분이 천한 침방 나인출신이었던지라, 영조는 스스로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로 가득찬 상태였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영조는 그 어떤 국왕보다 ‘모범’적인 왕의 삶을 살아가자 했다. 혹시나 신하들이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마치 자신이 입방아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치 초등학생들이 방학때마다 짜놓은 일일생활계획표처럼 하루 일정표를 만들어 단 일각의 오차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철저해도 너무 철저했던 국왕의 삶이 영조의 하루였다.

심지어 영조는 모든 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최악의 금주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예주(醴酒)는 일종의 감주로 알코올 성분이 거의 없는 맹숭맹숭한 맹물과 같은 무늬만 술이었다. 특히 금주령을 어긴 자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무시무시한 칼날을 함께 들이 밀었으니 전국의 술고래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낙선당에서 술 냄새 풍기며 공부하던 모습이 영조에게 딱 걸렸다. 엄청난 질타와 함께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사건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그날 영조 32년(1756) 5월 1일, 낙선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그 공간에 불을 질렀다. 왕세자가 공부하던 곳이 활활 불에 타올라 주변 시위하던 신하들이 조선시대 소방수였던 급수군(汲水軍)을 불러 불을 끄자고 했지만, 영조는 단 한마디만 했다. “置之!(번역:냅눠라!)”

그 후로 현 국왕인 영조와 차기 국왕으로 지명되었던 사도세자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선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현실정치에서 외면 받았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사도세자는 『무예신보(武藝新譜)』라는 새로운 병서 편찬에 몰입했다. 새로운 신흥무반층을 무예서 편찬 과정 속에서 모으려고 했던 것이다. 

특히 임오년의 화가 미치기 전에는 평양감영으로 밀행에 나서기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1761년 4월 7일부터 5월 1일까지 약 한달 가까이 평양을 밀행했다. 『행행일기(幸行日記)』를 보면 그 조심스런 움직임을 잘 담아 놓았다. 당시 일기의 작성자는 평양의 하급 군관 함대일(咸載一:1738~1771)이며, 사도세자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4월 7일부터 5월 1일까지 세자를 모셨다. 〈일기〉는 해당 시기 구체적인 행적을 적고 있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도세자의 평양밀행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주로 평양의 명승지를 중심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환궁하면서 황주 월파루에서 연회를 베풀고 활쏘기 시합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62년 윤 5월 13일,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세자는 ‘사도(思悼)’라는 시호(諡號)를 죽음을 통해 받았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는 해인 1776년 3월 20일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고 변경하여 슬픈 마음을 떨치려 했다. 정조는 직접 ‘사도(思悼)라는 것도 성스러운 뜻이지만,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만이 그 이름에 담겨 있으니 새롭게 고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이름 붙이고 창덕궁 후원에서 바로 갈 수 있는 곳에 조성하였다. 정조는 마음이 힘들거나 정책적 고민이 있을 때면 자정이 넘었을지라도 경모궁에 들러 아버지와 마음 속 대화를 하려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관련 있던 사람들이나 정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했다. 그 하나가 무예였다. 『무예도보통지』의 「병기총서(兵技總敍)」를 보면,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절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한 이야기를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 편찬이 아들이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정조는 국왕이 되면 절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이런 우회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렇다. 

 “영조 35년(1759)에는 사도세자(小朝)께서 정사와 관련된 일을 대신 처리할 때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도록 명하고, 죽장창·기창·예도·왜검·교전·월도·협도·쌍검·제독검·본국검·권법·편곤 12기를 증입하고 원보(『무예제보(武藝諸譜)』) 6기와 아울러 18기로 정하였다. 조선 왕조의 ‘무예 18반(武藝十八般)’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이후 1790년 4월 29일에 정조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기병들이 익혔던 마상무예 여섯가지를 추가하여 ‘무예24기’를 담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그렇게 무예서 안에서라도 아버지를 닮고자 했던 군주가 정조였다. 실제로 정조는 조선의 신궁(神弓)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쏘기 실력을 보여준 군주이기도 하다. 무예를 단순히 이론으로 혹은 정책으로만 풀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수련하며 마음을 다진 것이다.

사료를 보면, 사도세자의 주량은 초기에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사도세자의 폭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도제자는 술과 함께 벌어진 수 많은 사건과 오해 속에서 급기야 뒤주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아들인 정조도 독한 술을 좋아했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은 자는 집에 돌아가지 말라’는 정조의 명언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술 먹은 개구리가 만취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야! 뱀 나와!”라는 우화가 있다. ‘酒(주)님’을 모시면 이렇게 된다. 상황을 봐가며 적당히 즐겨야 술술 넘어가는 술이지,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인지,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독인게다. 술독에 자꾸 빠지면, 그 다음은 해마다 향내음 가득한 술잔만 받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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