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 표지. (자료=네이버 지식백과)
여유당전서 표지. (자료=네이버 지식백과)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고 신읍을 팔달산 자락에 조성하자 1790년 6월 순조가 태어났다. 수원부에 성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자 정조는 비로소 갑자년(甲子年) 구상을 추진하게 된다. 

정조는 젊은 학자 정약용에게 화성 축성계획안인 ‘성제(城制)’ 연구를 지시했다. 정약용은 연구를 통하여 작성된 성설(城說)을 정조께 올리는 글을 자신의 문집 ‘여유당전서’ 시문집(산문)10권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화성(華城)에 성을 쌓는 공사는 비용이 많이 들면서 일은 번거롭습니다. 시국은 어려운데 거창한 일을 추진하여, 성상(聖上)께서 걱정하며 애태우시지만 조정의 논의는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일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치밀하게 상의해야 하므로, 신은 삼가 예전에 들은 것 중에 중요한 여덟 가지 축성 방안을 뽑아 정리하여 아룁니다.”

“첫째, 성의 규모에 관한 의견입니다. 둘레는 대략 3600보(步,1보는3.8척, 1.178m)로 하고 높이는 2장(丈,1장은 10척) 5척(尺,1척은 31cm)으로 하여 석재와 공사비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둘째, 성을 쌓는 재료에 대한 의견입니다. 벽돌성이나 토성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벽돌 굽는데 익숙하지 않고 토성은 겉에 회를 바른다고 하지만 흙과 회는 서로 달라붙지 않아서 겨울에는 얼어터지고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어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돌로 성을 쌓는 것이 가장 낫습니다.

셋째, 해자에 대한 의견입니다. 성을 쌓을 때는 안과 밖을 두 겹으로 쌓는 협축(夾築)이 최선이지만 우리는 이런 방법에 능하지 못합니다. 안쪽 성은 산에 의지하고 평지에서는 흙을 높여야 하는데 이 흙은 호를 파서 얻을 수 있습니다.
 
넷째, 기초 쌓기에 대한 의견입니다. 수원부내 냇가에 흰 조약돌이 많으므로 이를 캐어서 쓰고, 구덩이를 1장, 길이를 4척 정도로 하여 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보마다 팻말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집해서 1단씩 메워 나가는데, 1단에 품삯을 얼마씩 주기로 하고 떠맡기면 그 사람이 스스로 계산해 볼 때 많이 져 나를수록 수입이 되므로 빨리 힘써 일할 것입니다.

다섯째, 석재 채취에 대한 의견입니다. 돌은 산에서 다듬어서 무게를 덜고 실어 나르는 데 편하게 해야 합니다. 돌 등급을 매겨 깎고 자르는 데 규제가 있게 하며 큰 것은 한 덩이에 한 차, 그 다음은 두 덩이에 한차, 작은 것은 세 덩이 혹은 네 덩이에 한 차로 날라서 성 1보를 쌓는데 일정한 용량을 공급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길닦이에 대한 의견입니다. 수레를 다니게 하려면 반드시 길을 먼저 닦아야 합니다. 이제 돌을 채취하는 곳에서 성을 쌓는 곳까지 정성을 다해 숫돌처럼 평평하고 화살처럼 곧게 길을 닦아야, 수레를 몰고 소를 채찍질하며 갈 때에 수레가 망가지는 일을 면할 수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유형거 전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 유형거 전도. (자료=화성박물관)

일곱째, 수레 제작에 대한 의견입니다. 기존의 큰 수레는 바퀴가 너무 높고 투박하여 돌을 싣기 어렵고 바퀴살이 약하여 망가지기 쉽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썰매는 몸체가 땅에 닿아 있어서 밀고 끄는데 힘이 많이 소비됩니다. 이런 형편이므로 새로 유형거(游衡車) 라는 수레를 고안해서 쓰도록 해야 합니다.

여덟째, 성을 쌓는 방법에 대한 의견입니다. 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성벽의 배가 불룩하기 때문입니다. 성벽의 높이를 세 등분(等分)으로 나누어 성을 쌓을 때, 아래의 두 등분은 올라갈수록 점차 안쪽으로 쌓되, 층마다 1푼씩 차이를 두어 줄어드는 모양새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함경도 경성(鏡城)의 성은 그 구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이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규형(圭形) 성벽 전도. (자료=화성성역의궤) 
규형(圭形) 성벽 전도. (자료=화성성역의궤) 

정약용이 정조에게 「성설」을 올리자, “옹성(甕城)·포루(砲樓)·현안(懸眼)·누조(漏槽) 등을 만드는 방법과 기중(起重,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림)에 대해 빨리 강구하라”라고 지시하면서, 규장각에 소장했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어 주었다. 신은 삼가 임금님의 명에 따라 여러 도설(圖說)을 지어 바친다고 적고 있다.

다산이 제안한 성곽 축성계획안은 성의 규모를 적절한 크기로 줄이고 성벽에 방어시설을 가득 설치하는 것으로, 기존의 읍성과는 크게 달랐다. 종래의 읍성은 주민을 모두 수용하는 긴 성벽이 늘어서 있는 대신 성벽 자체에는 이렇다 할 방어 시설이 거의 없었다. 

전쟁을 대비하기 보다는 평상시의 주민 통제 의도가 더 컸기 때문이다. 축성계획안을 작성할 때 다산은 31세에 지나지 않았다. 축성에 대한 특별한 경험도 없었고 더욱이 전쟁에 대한 체험도 없었다. 단지 1790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에 참배차 갈 때 건넌 한강의 배다리 건설과정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당시 조정에는 축성 전문가와 전쟁전문가도 있었지만 왕이 바란 것은 기존의 생각과 방식으로 짓는 성곽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종래의 성곽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모습의 성곽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화성이라는 신도시는 종래와 같은 군사적 행정적 명령을 수행하는 도시가 아니고 상업 활동이 활발한 새로운 개념의 경제도시였기 때문이다. 

왕의 이러한 의도는 다산에 의해 실현됐다. 다산이 성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다양한 방어 시설을 제안한 것은 평상시 뿐 아니고 유사시에도 성을 방어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결과였다. 정약용의 계획안은 실제 축성공사가 진행되면서 그대로 실현됐다.

61-4,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자료=화성성역의궤)
61-4,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자료=화성성역의궤)

지형 조건에 따라 성벽의 길이가 계획안보다 좀 더 늘어나고 방어 시설의 종류나 설치 위치가 달라졌지만, 정약용이 고안한 새로운 기계 장비들도 공사 과정에 직접 투입됐다. 정약용이 올린 ‘성설(城說)’은 후일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즉 ‘임금이 지은 화성 축성을 위한 기본 방안’ 이란 제목으로 내용변경 없이 ‘화성성역의궤’ 권1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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