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pandemic)’이 온다고 했을 때 우선 그 단어에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태풍 이름처럼 일회적·자의적으로 만든 말이 아닌데도 이런 말이 있었나 싶었다. 함께 나타난 단어들조차 온화한 구석이 없는 것들이었다. 재택근무, 화상수업으로 이어진 락다운(lockdown)에 ‘갑자기 이런 세상이 되다니!’ 싶고, 영업시간 단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셧다운(shutdown)이 원망스러웠다.

그 팬데믹의 고비만 넘기게 되면 숨 막히는 상황은 끝이겠구나 했던 기대는 다시 오미크론이라는 복병으로 돌연 물거품이 되었다. 이젠 굳이 팬데믹이라는 용어를 쓰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듯하던 ‘위드 코로나’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독감쯤의 고통을 겪는다지만 정말 그렇겠나 싶고, 감염 정점에서는 일일 몇십만 명이 감염될 것이라는 예측이 두렵다.

예상과 혼란, 우려 속에 우리는 또 새 학기를 맞게 되었고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학교일상회복지원단’을 ‘오미크론 대응 교육부-시도교육청 비상 체계’로 전환해서 ‘새 학기 오미크론 대응 비상 점검단’을 운영하고 있다. 숨 쉴 겨를 없는 상황이지만 직접적으로 우려와 혼란을 느낄 사람들은 누구보다 학교 선생님들 아닐까 싶다. 위기 대응 체제에 적응도 해야 하지만 어떻게든 또박또박 진도를 나가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이다. 출석수업이든 화상수업이든 출석 일수를 채웠다면 일단 진도는 끝내야 하고, 그건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면제받을 수 없었던 의무이기 때문이다.

진도라는 건,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학생들이 교과서에 담긴 지식 전부를 잘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이 점에서 교과서 중심 교육을 탈피하지 못하여 교육과정에 정해진 목표에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선진국에 비해 극히 회의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또 이 후진성이 코로나 시국에서 교육활동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더욱 아쉬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설명 위주 암기 교육을 탈피하고 활동 중심 탐구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다짐은 수십 년간 교육과정 기준을 개정할 때마다 선언해온 국가적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은 매번 선언에만 그쳐서 이젠 믿을 사람도 별로 없게 되었다. 코로나 시국은 이미 3년째가 되었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기억하게 하며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우리 교육의 형태는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잡은 고기를 입에 넣어 주려고 하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을 하자는 건 듣고, 듣고 또 들어 지겹게 되었지만, 우리 교육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학급별·교과별 재량시간 배당을 제안하고 싶다. 담임에게 주별로 1~2시간의 재량을 주면 수업 형태를 어떻게 운영하든 개인별 학습계획 발표, 그 계획에 대한 프리 토킹, 질의응답, 토론을 전개할 수 있다. 이 활동이 학습을 자율적으로 진행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고 설명·암기 위주 교육과 맞물린 ‘진도 빼기’를 지양하는 기틀이 되어 줄 것이다.

현행 교육과정의 창의적 체험활동을 이용해도 충분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창의적 체험활동은 옛 교육과정의 특별활동·재량활동과 마찬가지로 이미 의무적 수업과제로 가득 차 있다. 교육과정 기준을 수정하기 싫다면 ‘진도 빼기’를 혐오하는 학교부터 학교 교육과정을 그렇게 편성해서 실천해도 좋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에선 그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이런 사태가 다시는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안전한 세상이라 해도 그렇다. 다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고 설명하고 암기하게 하는 공부는 그만두어야 한다.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출현 여부는 미지의 영역에 있고, 오미크론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낙관론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예고했던 빌 게이츠는 다른 병원체에 의한 또 다른 팬데믹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다. 변화가 오고 있다. 어떤 회사는 코로나와 상관없이 주 3~4일 출근제를 구상하고 있다. 팍팍한 ‘진도 빼기’는 그만두고 원격수업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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