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서북공심돈의 야경. 달밤에 그곳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비움의 철학, 무예수련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매일 매일 그렇게 무예수련을 하듯 망각과 깨달음을 반복한다. (사진=필자 최형국)
수원 화성 서북공심돈의 야경. 달밤에 그곳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비움의 철학, 무예수련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매일 매일 그렇게 무예수련을 하듯 망각과 깨달음을 반복한다. (사진=필자 최형국)

수원 화성은 지킴의 공간이다. 성곽이라는 것이 본시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수원 화성에는 국내 여타의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어시설물이 있다. 대표적으로 공심돈(空心墩)이 그것이다. 일종의 망루처럼 높다랗게 돈대를 쌓아올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살피고, 사방으로 완전하게 격리된 철벽 방어시설이다.  

특히 속은 텅 비게 만들어 이 안에서 군사들이 화포를 쏘거나 숙식이 가능토록 설계하여 수원 화성 방어력의 핵심시설로 인정받았다. 원래는 남공심돈(南空心墩)·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등 세 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남공심돈(南空心墩)을 제외한 두 개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다. 그 중  '소라각'이라는 별칭이 붙은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원통형의 모양새에 내부에는 마치 서양의 성곽에서나 볼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을 연상시키는 건물이라서 더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성의 서쪽을 통하는 문인 화서문과 인접해서 아름다움과 함께 그 위용이 지금도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수원시의 도시를 상징하는 심벌마크에 서북공심돈이 그 중심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외형적 모습과 기능도 매력적이지만, 그 이름에 담긴 무예 철학적 가치를 말하고 싶다. 

‘공심(空心)’.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텅 빈 마음이다. 아무런 욕심도 없고, 사량 계교 번뇌 망상도 없이 순수하고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말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선입관념이나 자기 고집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이르는 단어다. 마음이 텅 비려면, 욕심과 번뇌를 버려야 한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예 수련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비우고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누군가를 억지로 이기려고 하면 헛된 욕심이 자라난다. 그리고 그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몇 대 맞으면 번뇌가 늘어난다. 설사 운 좋게 이겼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번뇌가 더 늘어난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무예 수련에서도 어깨에 힘 빼는 것에만 3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호흡이 위로 뜨고, 자세가 부자연스러워진다. 호흡이 위로 뜨니 당연히 몇 동작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른다. 저 단전 밑까지 아니, 저 발가락 끝까지 기운을 내려야 자세가 안정되는데, 자꾸 위로만 기운이 솟구쳐 오르니 제풀에 지치는 격이 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니, 칼이나 봉 등 무기를 들어도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무기를 휘두르니 몇 배로 힘이 더 들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근육은 갈수록 에너지 효율성을 잃고, 관절의 부담은 더 늘어나 종국에는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몸이 망가져 가는데, 바보같이 억지로 힘을 동원해서 수련을 진행하면 마음까지 상하게 된다. 그리고 무예 수련을 접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상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무예수련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된다. 내 몸을 살피고, 내 마음을 북돋기 위해 땀 흘렸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고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무예는 몸 공부가 기초인데, 몸 공부를 헛으로 하면 그리되는 것이다.

그리 오래 세상을 살지 않았지만, 세상살이도 그러하다. 필자도 여태까지 어깨에 힘주며 억지로 풀어낸 세월들이 많다. 물론 지금도 힘을 빼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철없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래도 더 좋은 사람으로, 더 진실한 무예 수련자가 되기 위하여 비우고 또 비워가려 한다.

꽉 찬 잔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채울 수가 없다. 잔을 비워야 더 향기로운 차를 부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비움을 통해서 그릇이 더 커진다. 그릇이 더 커지면, 언젠가는 그 비웠던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더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몸과 마음으로 안착된다. 그렇게 삶은 비움과 또 채움을 반복하는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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