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귀는 사랑 속에서 살을 나눈다 

사랑한다고 믿을 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식탁 

당신을 안고 빛나는 어둠을 먹으러 가고 싶다 (김선우, 「아름다운 식탁」 전문)


식탁이 새삼 소중한 때다. 거리 두기로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이 많아진 까닭이다. 집에서 밥 먹을 일이 늘면 식탁도 분주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코로나시국 주부들 아우성이 ‘돌 밥(돌아서면 밥)’이었을까.

식탁은 서양식 개념의 용어다. 우리는 밥상이었다. 밥과 찬을 차려 가족이 둘러앉는 밥상. 예전에는 밥상에서 말을 좀 하면 복 나간다고 꾸중 들을 정도로 과묵한 식사 교육을 받았다. 꼭꼭 잘 씹으라는 무언의 교훈인가 싶은 거룩한 식사예법은 이제 밥상머리 대화로 바뀌었다. 대화니 토론을 중시하는 교육이 불러온 변화다. 

그래도 여전히 대화를 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대화 분위기에 익숙지 않다 보니 자기 말만 세우다 충돌을 빚는 게다. 이 시에 묘사된 “살을 나눈다”는 사마귀네 식사와는 다르지만, 식탁에서 서로 잡아먹을 듯 갈등을 키우기도 한다. 

다 알다시피, 사마귀는 먹고 먹히는 섬뜩한 교미로 유명하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는 않아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교미가 다르고, 수컷이 잽싸게 도망쳐서 살아남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사마귀 사랑법의 결론은 ‘잡아먹을(힐)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사마귀 사랑법은 상상력의 자극제가 됐다. ‘죽어도 좋아’ 덤비는 막무가내 매력으로. 여기에는 개체 수 보존이나 생태계 섭리와도 다른 인간의 맹목이 끼어 있다. “사랑한다고 믿을 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식탁”이라는 시인의 갈파를 다시 봐야 하듯. 그냥 ‘사랑한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믿을 때” 가능한 식탁이라니, ‘눈 가리고 아웅’ 허위와 욕망도 넌지시 일깨운다.

오늘 어떤 식탁을 대했는가. 어떤 식탁을 차릴 것인가. 살을 나누는 사마귀처럼은 무서우니 소소한 일과를 나눌 정도의 식탁이면 좋지 아니한가. 과식이나 과욕이나 자칫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너무 과하지는 않게. 또한 다른 생명을 잡아 차리는 식탁이니, 먹고 먹히는 숨탄것들의 한살이에도 겸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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