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통령은 늘 자유롭게 제안하곤 했다. 원고를 읽거나 메모에 따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교육부 업무보고 때, 우리나라 학생들이 유례없이 공부에 시달려 놀이와 운동을 할 겨를이 없고 수면시간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아예 국가교육과정기준을 바꾸어 오전에는 초중고 학생 모두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등 주요 과목에 전념하고 오후에는 교내외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예체능 학습을 즐기게 하자고 했다.

국가기준 변경 절차가 간단하진 않지만 실현만 된다면 일거에 우리의 숙원이 풀리고 세계 최고의 교육혁신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다 울렁거렸는데 교육부는 그 제안을 ‘무마’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정규 수업을 마치면 각자 ‘방과후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우수한 학원강사와 학부모를 학교로 불러들여 그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취지부터 대통령 제안과 달랐고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 것도 아니었다.

수능 등급을 12등급에서 5등급으로 줄이자는 제안도 했다. 야단법석이 뒤따랐다. 어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신입생 선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5등급 중 1등급 정도면 어느 대학을 가더라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또 좋은 대학이란 특별한 능력이 있는 학생을 뽑을 수 있는 대학이 아니라 웬만한 능력의 학생이라면 훌륭한 인재로 양성해낼 수 있는 대학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99점과 100점은 엄연히 다르다”는 어느 고위직의 견해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교육적인지의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두 관점이 극과 극인 건 분명하다. 아쉽게도 수능등급은 결국 9개 등급으로 조정되고 말았다.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학교와 교사들에게 지시 명령하는 기관이 교육부-시도 교육청-시·군·구 교육청으로 중첩되어 교사들이 수업보다 행정에 허덕이는 점을 지적하고 교육정책은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에서만 개발해도 충분하니까 교사들이 스스로 가까운 시군구 교육청을 찾아가 상담하고 그 교육청에서는 학교에 나가서 친절하게 도와주는 일만 맡게 하자는 제안도 했다. 시군구 교육청 이름을 ‘교육지원청’으로 바꾼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교육지원청들은 지금 교사들의 수업 지원에 전념하고 있을까?

올봄에 학부모들에게 보낸 각 학교의 안전계획 문서는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60~70쪽에 이르기도 했다. 그걸 다 읽은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교육청의 안전계획은 무려 300쪽에 가깝다고 했다. 방대해서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실천력도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전계획 문서 이야기를 들으며 그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는 특이했다. 그 특이함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인용되는 것은 안타깝고 민망한 일이다. 그의 교육적 신념이 묻히고 만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는 학생들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2021 학교안전계획 문서를 보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학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일 년에 한두 번 현장학습을 실시한다. ‘소풍’의 이름을 ‘현장학습’으로 바꾸어 무엇이 달라졌을까? 보물찾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어보다가 뭘 좀 견학하게 해서 학생들 실력이 향상되었을까? 교장이나 교사들이나 교외학습의 위험부담을 좋아할 리 없다. 교육청에서 돈을 주면 그 돈만큼 더 데리고 나가는 학교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 대신 규제가 방대해진 걸까?

그 시절에 전 학년에 걸쳐 매달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한 학교가 있었다. 6년이면 60회! 스카우트 같은 단체활동을 하는 학생이면 백 번쯤 나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학교 교장은 현장학습계획에 두 쪽씩 의례적으로 덧붙이던 안전지도계획을 생략하자고 했고, 매일 아침 운전기사들을 불러서 함께 모닝커피를 마셨다.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종일 교장실에서 기사님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교장으로부터 대우받는 걸 알게 된 기사들은 마침내 운전석에만 앉으면 교장이 주는 모닝커피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낭만적이어서 못마땅한가? 몇십, 몇백 페이지 문서가 더 간절하게 보이겠지만 글쎄 다 마음에 달린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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