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그날처럼 오늘도 비가 내리네”

1795년(정조 19년) 음력 윤 2월 9일 정조대왕 능행차가 수원에 왔던 그날도, 능행차 재현 행렬이 수원에 도착한 2022년 10월 9일에도 비가 내렸다.

1795년 윤 2월 9일 새벽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면해 있는 화산을 향한 원행길에 나섰다. 출발지인 창덕궁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8일이 걸린 여정이었다. 다음 날 의왕 사근참행궁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열린 '2022 정조대왕 능행차'. (사진=김우영 필자)
빗속에서 열린 '2022 정조대왕 능행차'. (사진=김우영 필자)

장안문에 들어서는 정조대왕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장안문에서는 화성유수 조심태를 비롯한 관료들과 병사들이 엎드려 임금을 맞이했다. 대로를 따라 화성행궁에 도착한 정조는 원로에 고생이 많았던 어머니 혜경궁을 장락당에 모시고 저녁식사까지 올렸다.

“비를 맞은 것은 미안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으니 다행이다. 더욱이 경작이 곧 시작될 시기에 논두렁 밭두렁이 젖었으니 농부들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이는 당시 정조대왕이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어찌 미안한 마음이 없었을까? 음력 2월 초순에 내리는 비는 살이 아플 정도로 차갑다.

빗속에서도 위풍당당한 능행차 행렬...환호 박수 이어져

227년이 지난 10월 9일의 빗방울도 가벼운 옷차림이었던 내 몸을 떨게 했다. 그러나 행렬이 지나가는 연도를 떠날 수 없었다. 비에 흠뻑 젖은 채 걸어오고 있는 저 행차 참여자들을 외면한 채 집으로 돌아오기가 차마 어려웠다. 그보다도 올해는 능행차를 꼭 보고 싶었다.

혼자만 그런 마음이 아니었나보다. 여민각이 있는 화성행궁 광장 네거리, 북수동, 장안문 등엔 수많은 인파가 제법 세찬 빗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길가에 늘어서 공연단을 맞이하고 있다.

“힘내요!”

“아이구 비를 흠뻑 맞았네. 추워서 어쩌나...”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환호와 박수도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빗줄기에 아랑곳없이 흥겨운 공연을 펼쳐 박수와 환호를 받은 수원문화원 검정고무신 공연단의 ‘각설이 타령’. (사진=김우영 필자)
빗줄기에 아랑곳없이 흥겨운 공연을 펼쳐 박수와 환호를 받은 수원문화원 검정고무신 공연단의 ‘각설이 타령’. (사진=김우영 필자)

정조대왕은 24년의 재위기간 중 총 13번의 현륭원(지금의 융릉) 원행을 했다. 잘 알려진 원행은 즉위 스무 해 째인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맞아 8일간 행했던 대규모 행차 ‘을묘년 원행’이다

그런데 ‘미디어 배다리’라, 내년부턴 수원 만석거에 배다리를 놓자

수원시는 1974년부터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6년 심재덕 시장이 수원화성축성 200주년 때 지금의 규모로 확대 발전시켰으며 2016년부터는 서울 창덕궁에서 수원화성 구간, 2017년 화성 융릉까지 59.2㎞ 구간을 복원, 수원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대표 축제로 인정받고 있다.

올해 공동재현 전체 프로그램에는 총 3천명 이상의 출연진과 345필의 말이 동원됐는데 수원시 구간에만 1200여명의 출연진, 말 111필, 취타대 4팀 등이 투입됐다.

1일차인 8일 서울 창덕궁에서 시작한 행렬은 한강 ‘미디어 배다리’를 건너 9일 수원시 화성행궁과 화성시 융릉에 도착했다.

그런데 ‘미디어 배다리’라...

2016년과 2017년 행사 당시 서울시는 이촌지구에서 노들섬 북단까지 실제 배다리를 만들었고 이는 큰 화제가 됐다. 나도 일부러 서울에 가서 한강 배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2018년과 2019년엔 태풍 등으로 설치가 무산됐다. 이어 코로나19로 2020년과 2021년엔 행사 자체를 하지 못했다.

올해 서울시는 제작과 철거 부담이 상당하다며 실제 배다리 대신 노들섬 안에 LED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아쉽다. 수천명의 능행차 행렬이 배다리 위로 한강을 건너는 모습이야말로 서울시가 전 세계에 자랑할 명장면이 아닌가.

앞으로도 서울시가 안하겠다면 수원시에서라도 하자. 능행길에 있는 조기정 방죽(만석거)에라도 배다리를 놓으면 된다!

“조선시대에도 외인부대가 있었나?”

2일차인 9일 거리공연을 즐기다 보니 드디어 기다리던 능행차 행렬이 나타났다. 말을 탄 선기대(善騎隊, 기병부대)와 함께 위풍당당한 조선의 군사들이 호위하는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왕실 사람들과 신하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군사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외인부대가 있었나?”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아마도 인근 미군부대 소속 군인들 같은데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행사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줘 관람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내 눈과 마주친 키 작은 흑인 여군도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어줬다.

행렬 끝에는 정조대왕, 채제공, 조심태를 비롯한 신하들과 군사, 백성 등 거대한 크기의 움직이는 인형들과 연기와 불을 뿜어 내는 용 등이 등장해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했다.

행궁 광장에 들어선 움직이는 거인 인형도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김우영 필자)
행궁 광장에 들어선 움직이는 거인 인형도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김우영 필자)

화성행궁 광장에서의 뒤풀이 한마당 대동놀이를 끝으로 올해 수원화성문화제가 마무리 됐다. 마지막 날 비만 안 왔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3년 만에 열린 축제여서 행복했다. 나이를 더 먹어 주름살이 한 개 더 늘 테지만 벌써부터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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